변두리 동시상영관 옆 자장면과 <로봇 태권브이>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50)

등록 2005.04.07 07:29수정 2005.04.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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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옛날 추억을 떠올렸던 동네 앞  중국집의 옛날 자장면

옛날 추억을 떠올렸던 동네 앞 중국집의 옛날 자장면 ⓒ 김정은

야근을 하고 퇴근 하는 길, 간단히 저녁식사를 때우기 위해 오랜만에 집 근처 중국집에 들어가서 자장면을 시켰다. 배달을 시키지 않고 이렇게 중국집에서 직접 자장면을 먹는 것이 정말 얼마만일까?


'옛날 자장면'이란 이름의 자장면을 잘 저어 입안에 넣으니 탄력있고 쫄깃한 면발의 느낌과 달지 않고 구수한 자장 소스의 맛이 어우러져 입안 가득 감칠맛이 살아난다. 더군다나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와 감자의 씹히는 맛이란….

분명 여럿이 한끼 때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켜 먹었던, 불기 직전의 배달 자장면과는 너무도 다른 이 느낌, 자장면을 정말로 좋아했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느끼는 옛날 자장면의 맛이랄까?

동시상영관과 로봇태권브이, 그리고 중국집 짝꿍

초등학교 시절 나는 동네 동시상영 극장 옆에서 작은 중국집을 하는 중국집 딸과 짝궁을 한 적이 있었다. 변두리 극장 옆에서 중국집을 하다보니 그 아이에게는 늘 공짜 극장표가 있었고 그 친구 덕분에 나는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로봇 태권브이>를 공짜로 구경할 수 있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일본산 만화영화 마징가 Z가 일본 만화영화인지도 모른 채 열광했던 시절, 마징가 Z의 무쇠 팔, 무쇠다리와 두 얼굴의 인간 아슈라 백작이 흑백 TV 화면을 누볐다면 스크린에서는 한국산 로봇 태권브이의 로켓주먹과 깡통 로봇의 익살스러움이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아무튼 그 친구 덕분에 공짜 영화를 구경하고 나면 곧바로 극장 옆에 있는 친구 집에 들어가 공짜 자장면을 얻어먹곤 했었다. 그때 친구집에서 얻어먹던 공짜 자장면의 맛은 솔직히 <로봇 태권브이>의 재미를 상쇄할 만큼 맛있었다. 그러나 모든 변두리 극장의 운명이 그렇듯 그곳 극장도 망해버렸고 극장 앞 중국집 그 친구도 이사를 가버려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자장면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대학 시절, 당시만 해도 힘들게 명맥을 유지하던 학교 근처 동시상영관 극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스크린에 마구 비가 오는 19세 이하 관람불가 영화를 장시간 본 후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먹곤 했다. 그 이후로 동시 개봉관은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고 자장면 또한 그 옛날 맛을 잊어버렸다.


DVD와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사라진 옛날 자장면

어느덧 세월이 흘러 요란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집안의 DVD나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는 일이 많아진 요즘, 가끔 옛날 생각이 나서 자장면을 시키게 되면 실망 그 자체이다. 면발은 이미 불어 엉겨붙었고 자장 소스는 왜 그리 달고 기름 덩어리던지….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해서 집안에서 영화관 같은 음향과 화질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 옛날 변두리 극장에서의 추억의 자장면 맛은 그대로 복제할 수 없는가보다.

하긴 변두리 극장의 로봇 태권브이와 자장면 한 그릇이면 뛸 듯이 기뻐했던 어린 시절, 그 추억의 기저에는 지금의 디지털로도 복제하기 도저히 불가능한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짝꿍 친구와의 풋풋한 우정, 옛날 자장면과 변두리 극장의 꾸미지 않는 소박한 맛, 우리 나라 본격 장편 만화영화 <로봇 태권브이>까지….

우연히 옛날 자장면 맛을 접하고 잊어버린 듯했던 예전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토록 자장면 맛 투정을 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사라져버렸지만 문득 가슴 한구석에 꽁꽁 숨겨져 있는 즐거운 추억에 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옛날 자장면의 추억에는 그리움과 배고픔이 함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자장면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챙겨 중국집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은 휴일, DVD로 영화를 보다가 그때 고이 간직했던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자장면을 시켰다. 나에게 새롭게 맛있는 추억을 되살려준 고마운 중국집 자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은 또다시 예전 변두리 극장에서 <로봇 태권브이>를 보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배달된 추억의 옛날 자장면, 그러나 아쉽게도 그 자장면의 맛은 내가 중국집에서 처음 먹었던 그 자장면의 맛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옛날 자장면의 맛을 찾았노라고 기뻐했던 때가 불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새 주인이 바뀐 것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도 확실히 자장면 맛은 그때 그 자장면이 아니었다.

크게 실망한 채 자장면 그릇을 주섬주섬 챙기다 보니 갑자기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배고픔이었다. 아무리 추억의 맛이라고 해도 그 당시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난 왜 잊어버리고 살았는지….

어릴 적 변두리 극장과 <로봇 태권브이> 그리고 자장면의 따스한 추억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짝꿍 친구와의 살가운 정과 사라져 버린 소박한 동시상영관의 추억 외에도 배고픔이란 변수가 숨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 50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 50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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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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