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7회(8부 : 푸른 낙엽)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4.25 17:09수정 2005.04.2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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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 / 이정남 화백 제공
금낭화 / 이정남 화백 제공김형태

"소용없는 일이야.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자. 처음엔 힘들더라도 차츰 나아질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운명처럼 받아들이자니. 언제부터 철민씨가 운명론자였어. 세상에 확정지어진 운명이 어디 있느냐고. 운명은 스스로가 개척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미안해, 결국 나는 조부님의 유언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나봐. 그리고 어차피 나는 너희 집에서 바라는 사윗감도 아니잖아. 장래가 촉망되는 의학도 중에서…."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그만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언뜻 보니 노진이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더라. 노진이라면 너와 잘 어울릴 텐데'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대신 "나를 잊어버리고 너의 새 길을 찾아 나서"라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온몸으로 흐느끼며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듯 가버렸다.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다. 정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그 흔해 빠진 유행가 가락이 나의 현실이 될 줄이야.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그러나 고상하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정말 내 자신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애써 위로를 하였다. 이제는 그저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빌어줄 밖에.


멍울진 진주


그대의 흐려진 창을 바라보던
멍울진 진주
아름다운 슬픔에
이슬을 깨문다

어차피 꽃 피우지 못할 인연인 걸
사랑의 화살을 맞은
신화 속의 주인공인 양
철없이 꿈꾸었던
추억의 높이….

조금만 덜 사랑했어도
놓지 않을 텐데
지나친 애정도 병이기에
이렇게 웃는 울음으로 보낸다

감미롭게 들려오는
별빛, 이제는
목쉰 촉조처럼 파고들고
젖은 꽃잎에
눈감은 촛불이
흔들거린다

그대의 등을 보는
가난한 진주,
두 손 모아 행복을
빌어줄 밖에



그날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녀가 만나자고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그러나 나는 바쁘다는 구실로, 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거절했다. 하루라도 안보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그녀를 정말 위하는, 참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최선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노진을 찾아갔다. 맨 정신으로는 얘기를 못할 것 같아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다. 녀석은 무슨 일이냐고 했다. 나는 그냥 따라만 오라고 했다. 이윽고 우리는 전에 한철과 노진이 자주 들렀던 술집 '파랑새'에 도착했다. 나는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노진이 눈을 크게 뜨고 정말 무슨 일이냐고 거듭 거듭 물었다.

"왜 아버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냐? 위독하셔? 뭔데 그래 임마, 말 좀 해봐. 답답해서 미치겠다."

"뭐, 답답해서 미치겠다고? 잠시 후면 너무 좋아서 춤을 출 텐데."

나는 그의 말을 그렇게 답을 하면서 병따개로 힘주어 소주병을 땄다. 마개가 뻥 하는 소리를 내며 멀리까지 날아가더니 구석에 때그르르 하면서 추락했다. 순간 내가 병마개 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고이고이 간직하고 간수하던 보배를 녀석에게 이렇게 자진해서 내어주다니.

나는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아주 철철 흘러넘치도록. 그대로 마실까 하다가 술을 빌려 말하는 것이 왠지 치사하고 도리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맨 정신으로 얘기하기로 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했다. 초희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라고. 녀석은 그게 무슨 잠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다 알고 있었어 임마, 너 오래 전부터 초희를 좋아하고 있었잖아. 나를 속이려고! 귀신을 속여라 귀신을… 아무래도 나와는 인연이 아닌가 봐. 초희를 너한테 맡길 테니, 정말 나보다 몇 백 배 더 끔찍이 위해 주고 사랑해 줘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슬프게 하거나 속 썩이면 그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초희를 조금 이라도 아프게 하는 날이면 그 날이 네 녀석의 제삿날인 줄 알아. 아주 네 녀석 을 죽여 버리겠어. 초희를 부탁 한다 노진아. 흑흑흑…."

나는 술도 먹지고 않고 술 취한 사람처럼 주정을 하고 있었다.


이별이후 1

네가 떠난 이후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내 가슴

조금만 너를 덜 좋아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리지는 않았을 텐데

조각난 내 가슴 위로
억수 같은 비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이별이후 5

너와 헤어진 후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본다
저 찬비를 피해보려 날아 보지만
부러진 날개 죽지 때문인지
다시 벼랑으로 내딛는 비둘기
떠난 너의 환영을 좇아
개울의 밑바닥을 헤매도는
나는 방랑자


이별이후 6

상처는 아물어도
상흔은 남는다고 했던가
분명 너는 갔는데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 살고 있으니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8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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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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