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69회

등록 2005.04.26 07:52수정 2005.04.2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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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아직까지도 장난기는 여전하구나. 오늘도 놀랠킬테냐?"

그 말에 나무 뒤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옅은 청의에 문사건까지 쓴 유생의 차림이다. 여자의 방심을 흔들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얇은 입술이 왠지 냉정하게 보이게 하는 인물이었다. 바로 양만화의 장원에 나타나 초혼령을 회수한 초혼령주, 바로 그다. 사내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소제 전월헌(銓月櫶)이 대사형을 뵈오."

그는 자신의 무안함을 감추어주기 위해 대사형이 그리 말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몰래 다가가 대사형을 놀라게 하는 장난을 하곤 했다. 대사형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항상 놀란 표정을 지어 주었다. 퉁방울만한 두 눈을 뒤룩거리며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 내리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재미있어 신법(身法)과 보법(步法)에 관심을 가졌고, 은신술이나 잠형술을 익히려 노력한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굳이 엿들으려고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막내사매를 꾸짖는 모습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 아팠다. 대사형이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운령이란 사실 역시 그가 기억하기로 처음이었다.

"운령을 야단치는 것 같아 속이 상하더냐?"

대사형은 말을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남녀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이미 대사형이 알고 있다. 사형제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르는 척 해준 것도 사실이었다.


"별 말씀을…."

그는 또 다시 걸음을 떼었다. 전월헌 역시 대사형의 뒤를 따랐다.


"운령은 요사이 내 원망을 많이 했겠구나."

운령은 대사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아마 그 일로 인하여 이곳에 왔을 것이다.

"미리 너와 상의하고 처리해야 했지만 나는 네가 알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분명 풍철한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일에 다른 복안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운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한 상의는 자신이 대사형에게 드리는 것이지 대사형이 자신에게 하는 게 아니었다. 언제부터 이리 되었을까?

"그러기에는 우리 사형제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게지."

그랬다. 그것은 이미 운령도 절실히 느끼고 있던 터였다. 사형제 간을 잇고 있던 그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리고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녀를 초조하게 했었다.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과도 같이 탄식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사형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왔다.

"이 우형이 풍철한 정도를 놓쳤으리라 생각했느냐? 더구나 시검사도의 흔적을 남겨둘 정도로 우매하다고 생각했느냐?"

운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대사형이 실수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접어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꾸지람이 분명했다. 조금 전 담천의의 문제와는 또 달랐다.

"그들이 완전하게 준비된 거요?"

운령이 물을 말을 조심스럽게 전월헌이 대신 물었다.

"아니…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기에 흘린 것이다. 그들이 완벽하게 준비되면 나 역시 그들을 통제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 말에 운령은 신형을 휘청거렸다. 당새아가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다. 너무 뛰어나 비교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똑똑하다.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대사형이 왜 그리 고심하고 또한 그런 엄청난 실수를 했는지… 아니 실수가 아닌 고육책(苦肉策)을 생각했는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사형… 소녀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녀의 고운 볼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사형은 자신보다 훨씬 더 넓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의 부친을 들먹이며 했던 말은 담천의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배척받고 버림받으며 자란 그였지만 그는 이 땅과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설사 그들의 대계(大計)가 실패로 끝난다 해도 죄 없는 사람들이 겪을 고초와 아픔을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저려왔다. 처음 그들의 시작이 그것 아니었던가? 그 의미를 잊어버린다면 주원장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얻은 힘으로 자신의 위세를 떠는 일과 무어 다를게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뜻밖의 행동에 대사형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듯 했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거늘… 너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나약한 내 자신을 변명한 것뿐인데…."

그는 운령을 일으켰다. 운령은 이제야 알았다. 대사형은 큰 그릇이다. 맏이란 것이 나이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누가 특별히 가르치지는 않아도 맏이는 맏이로서 키워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배운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고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또 하나의 문제였다. 그것을 받아 든 대사형의 얼굴에 애잔한 빛과 함께 미세한 노기가 스친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구나."

서찰. 기이한 내용의 서찰이었다.

<용문장주(龍門莊主) 친전

死別已嘆聲,(사별은 소리내어 울 수도 있지만)
生別常惻惻.(생이별은 항상 슬픔만 더할 뿐이네)
江南瘴癘地,(강남은 열병 유행하는 땅인데)
逐客無消息.(쫒긴 나그네 소식이 없구나)
故人入我夢.(오랜 친구 내 꿈속에 나타나니)
明我長相憶.(내 반기길 서로 생각이 간절해서이리라)

유곡(兪谷) 배상.>

용문장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장원의 이름이었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단지 두보(杜甫)의 몽이백(夢李白)이란 시에서 따온 여섯 구절이었다. 두보가 관헌에 쫒기는 이태백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였는데 그 말미에는 세 송이의 목단화(牧丹花)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명백했다. 유곡은 천지회의 표기인 세 송이의 목단화를 그려 넣고, 또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으로 보아 반드시 송하령을 돌려달라는 의미였다. 천지회가 이렇듯 명백하게 표기를 남기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목단(牧丹)은 중원의 꽃이었다. 온화하면서 우아하다. 이미 당대(唐代)서부터 향기가 뛰어나 화왕(花王)으로 일컬어졌다. 또한 어떠한 위협과 권세(權勢)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한 절개를 지키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천지회의 표기로 삼은 것은 아마 주원장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오중회의 정신을 나타낼 표식으로는 가장 적합한 꽃이었을 것이다.

송하령이 천지회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파악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녀를 데려 올 당시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를 심하게 핍박만 하지 않는다면 천지회에서는 묵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유곡이라면 자신들이 송하령을 데려 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았을 것이다. 그 일이 끝나면 돌려보낼 것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보내달라고 요구한 것은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운령은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들과는 적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들 간에는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며 조용히 바라보는 상태였다. 굳이 적이 될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손을 잡을 사이는 더 더욱 아니었다. 반황실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천지회는 무시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다양하고 방대한 조직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약삭빠른 자들이지. 그들은 민초들을 위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야. 그들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부를 지키고자 패거리를 만든 놈들일 뿐이니까. 아마 이민족에게 나라가 넘어간다 해도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와 부를 지킬 수 있다면 그쪽으로 붙을 놈들이다."

혹독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천지회의 본래적인 태생이 사실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오중사걸을 기린다는 순수한 뜻으로 시작되었고, 주원장에 반기를 들기는 했어도 그것은 결국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지위와 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박탈하려는 황실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지 다른 뜻이 있어 결사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 독선적인 황제에 대한 저항은 그럴 듯 했지만 민초들의 삶에는 애초부터 아예 관심도 없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언젠가 분명히 적이 될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들까지 적이 된다면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잘되었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는 명분이라도 있으니 그녀들을 돌려보낼 수 있겠구나. 양보했다는 모양새도 있으니 말이다."

너무나 간단했다. 한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면 이리도 마음이 편한 것일까? 운령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이제야 담천의란 자로부터 시작된 모든 미몽에서 벗어나는 듯싶었다. 서둘렀던 일들이 하나같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무리하게 추진했던 일들을 빨리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래 생각했던 대로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형. 소제가 백주(白酒)라도 올리리까?"

술한잔 하자는 말이다. 전월헌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오랜만에 사형제 간에 나누는 술이란 감흥이 남다를 터였다. 이제 운령은 다시 그 예리하고 뛰어난 지혜의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자신들이 본래 원했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는 운령과 전월헌의 등을 토닥거렸다.

"배가 출출하구나. 저녁 시간이 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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