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이 은근한 불길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 마리 오리가 기름을 방울방울 눈물처럼 떨구고 있었다. 이미 누렇게 변색된 것으로 보아 이미 다 익은 것 같았다.
"귀찮은 놈이군."
이틀째였다. 어제도 저놈은 이 늦은 밤에 찾아와 한 시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돌아갔었다. 그러려니 했지만 오늘 다시 같은 시각에 찾아온 것이다.
"그 아이인가?"
오늘은 황원외의 사부인 도노(屠老)라 불린 노인 외에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운 노인이 한명 더 있었다. 누런 마의(麻衣)를 걸치고 겨울임에도 팔뚝과 정강이를 그대로 내놓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두 노인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아니 장기를 둔다고 하기보다 술을 마신다고 해야 옳았다.
그들의 술 마시는 행동은 아주 독특했다. 대개 두 사람이 술을 대작하게 되면 서로 잔을 권하고 따라주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두 노인은 각기 따로 술 호로를 놓고 각자의 잔에다 따라 마셨다. 상대의 잔이 비던 말든 그들은 서로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술 한 잔 마시고 모닥불 앞에 놓인 소도로 익은 부위의 오리고기를 한점 베어 물면 그만이었다.
"지 죽을 줄 모르고 설쳐대는 것은 지 부친이나 다름없지."
한참 만에 도노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대답은 퉁명스러워서 귀찮다는 투가 분명했다. 담천의가 듣지 못 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엔 왜 왔누?"
그들의 대화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한 노인이 말을 하고나면 거의 일각이 지난 후에야 대답이 나오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장기에 몰두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장기는 그저 술을 느긋하게 즐기기 위한 하나의 유희 같았다. 자기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는 또 한참 만에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인간 백정(白丁) 한 놈 만들려고 검 한 자루 가지고 꼬신게지."
검을 익힌 자에게 있어 명검(名劍)은 그 무엇보다 큰 유혹이다. 악공(樂工)이 훌륭한 악기(樂器)를 탐하듯, 글을 쓰는 자가 명필(名筆)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참을성은 지 부친과 똑같군."
그러고 보니 담천의가 이곳에 온지 벌써 반시진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한쪽 귀퉁이에 주저앉아 그냥 미동도 없이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무언가 묻게 되면 저 괴팍한 노인은 오히려 입을 다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것도 똑같지."
"헌데 저 아이가 자네는 왜 찾아와?"
"오늘은 술맛이 나지 않는군."
"그러고 보니 오리고기도 꽤 뻣뻣하군. 너무 늙은 놈을 잡지 않았나?"
정말 질긴 것인지 이빨이 부실해 그런지 모르지만 두 노인은 아주 질긴 고기를 씹는 것처럼 천천히 우물거리고 있었다.
"지 부친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서겠지."
도노의 대답은 한참 만에 다시 나왔다. 아마 오리고기 한점을 씹지 않고 침으로 녹여 먹는다면 가능할 시간이었다.
"그 양반 앞뒤가 꽉 막혀 스스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자식은 용케 살려두었군."
"차라리 남겨두지 않는 게 좋았을게야. 똑같이 될 것 같지 않은가?"
"말해 주었나?"
"뭔 말을…? 자네는 해줄 말이라도 있나?"
"그래도 그 양반을 봐서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자넨 두칠에게 저 아이의 말고삐라도 잡으라고 할텐가?"
"그래야 한다면 해야겠지."
"풍철영이 좋아하겠군. 자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자가 알았다면 아마 말똥 치우는 일 정도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을 걸쎄."
도노는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왜 화가 나는지 몰랐다. 아니 저 아이를 보는 순간부터 화가 나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도 사실 오랜만이었다.
"자네가 흥분한 걸 본지가 벌써 십년이 넘는 것 같군."
"십 오년만이야."
"벌써 그렇게 되었군."
두 노인의 얼굴에 쓸쓸함과 함께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젊은 날 가졌던 야망과 포부가 어느 순간에 와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밟고 온 세월의 흔적만큼 가라앉은 앙금은 어떤 형태일까?
"자넨 그대로 둘 생각인가? 어찌되든 상관없이?"
마의 노인의 말에 도노는 불길이 잦아드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인생도 저 모닥불과 같은 것일까? 활활 타올랐다가 바람이 불면 날라 가버릴 재만 남기는 것이 인간의 삶인지도 몰랐다. 그저 쌓인 앙금은 저렇듯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자네에게 무슨 방도라도 있는겐가? 정말 자네는 다시 손에 피라도 묻히고 싶단 말을 하고 싶은겐가?"
"이곳에 섭장천이 와 있네."
"알고 있네."
마의노인의 말에 무심코 대답했던 도노가 고개를 돌려 마의노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주친 두 눈에서 기이한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 친구는 무언가 결심한 것이 틀림없었다. 저 아이가 이곳으로 올 것을 미리 알고 기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자네 정말로…?"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두리 뭉실 저 아이를 끌어들이려는 풍철영의 처사를 방관하고 싶지 않네. 그 역시 그러고 싶어 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내 손에 다시 피를 묻혀야 한다면 나는 저 아이가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선택하길 바라는 걸쎄."
"빌어먹을…!"
도노는 술잔을 급하게 들이켰다. ‘방관(傍觀)’이란 단어가 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의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 아이가 차라리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들은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이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과거 그 어느 때처럼 방관하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 방관으로 인하여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하는 고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는 도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앞에 있는 친구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어찌 생각하면 그들이 속한 조직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이제는 명목뿐이었지만 어떠한 계기가 있다면 다시 움직일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조직은 그들의 평생이 담긴 조직이었다.
"자네 생각이 옳겠지."
도노가 고개를 끄떡이자 마의노인의 입가에 마른 웃음이 걸렸다. 평생을 같이한 친구가 그의 마음을 모를 것도 아니고, 그 역시 친구의 마음을 모를 것도 아니었다.
"같이 가겠나?"
"내가 왜? 가거든 나는 이곳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다고 그에게 전해주게. 오늘밤이라도 조용히 이곳을 떠나달란다고 전해주게."
도노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마의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담천의 역시 일어섰다. 조용히 듣고만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움직일 시간이었다. 일어나는 담천의를 흘낏 보며 말했다.
"눈치는 빠르군. 가 보세."
마의노인의 말에 휘적거리며 걷는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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