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81회

등록 2005.05.12 07:59수정 2005.05.1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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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자신의 처리능력 밖이었다.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이 대명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비운의 황손(皇孫)이었다. 태조의 적손(嫡孫)이자 정난의 변으로 숙부에게 황위를 쫓겨난 혜제의 황자였다.

금릉이 붕괴될 당시 혜제의 어린 황자 둘이 은밀하게 빠져 나갔다. 영락제와 그 수하들로서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격이었다. 힘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황권을 쥐기는 하였으나, 적손은 언제고 명분이 주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찾아낼 수 없었다. 쉽게 불타고 잘려진 시신 중에 섞여 있으리란 결론을 내리고 덮어 버렸다.


이 일은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현 황상인 영락제에게 알려진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이 일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이만하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저들이 그 아이를 데리고 빠져 나갔다면 저들은 그 아이를 내세워 현 황실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을지도 몰랐다.

골육상잔의 비극이 다시 재현되고 이 중원에 피바람 몰아치는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일단 물러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 후에 대처해야 했다. 자칫 그 사실이 알려지면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여서 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능력은 아직 없었다.

"그 자를 섭노선배께 전해주게."

그는 조국명에게 말했다. 좌중은 이 싸움에서 풍철영이 패했음을 알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혈육과 관계된 일이라면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국명은 혼절해 있는 그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모질게 손을 썼군."


송풍진인의 몸을 살펴보던 섭장천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잠시 혈도만 점혈한 것이 아니다. 그의 내력을 상하게 하여 정상적으로 돌아오려면 족히 한달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자신의 사형을 암습한 자이니 용서할 리 없었다.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송풍진인은 섭장천이 해혈을 하자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을 보며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았다. 굳이 계속 인피면구를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씌어진 매미날개 같이 얇은 가죽을 벗겨냈다. 그 안에는 아교같은 것들이 뭉쳐져 얼굴에 붙어 있었는데 그것마저 닦아내자 삼십대 초반의 훤한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정운학이었다.


"한 가지만 더 부탁하세."

섭장천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풍철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엇이오?"

"중의는 이미 죽었을 테고 선화란 여자를 데리고 오게."

그 말에 풍철영 대신 조국명이 물었다.

"산서 나가의 나충일과 함께 들어 온 여자를 말함이오?"

"그렇네. 나충일인가 하는 아이는 필요 없네."

조국명은 풍철한을 바라보았다. 풍철한이 고개를 끄떡였다. 조국명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섭장천의 수중에 놀아나는 꼴이었다. 사실 도박에 있어 천왕패를 잡게 되면 그 노름판은 다음 판을 기약하지 못하고 아예 끝나는 것이다.

그 때였다. 평소 말이 없던 반당이 한걸음 나섰다.

"본인은 철혈보의 반당이라고 하오. 그동안 섭노선배의 검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무인으로서 흠모해 왔소. 오늘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리오."

이것은 도전이었다. 무인으로서의 도전임을 분명히 했다. 섭장천이 거인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반당이라면 승부를 속단하기 어렵다. 더구나 반당이 나선 것에는 다른 의미도 있었다. 지금 섭장천의 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일이었다.

"허허… 자네의 도는 들어 본 적이 있지."

섭장천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사람들은 지금껏 승부를 피한 적이 없는 진정한 무인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섭장천이 피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섭장천의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하지만 이 안에서 드잡이 하는 것은 풍장주가 원치 않을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교묘했다. 도전을 피했다는 오명도 가리고 그가 틀어쥔 상황을 놓치지도 않았다. 반당과의 승부는 도박판에서 천왕패의 효력을 잃게 하는 판을 깨버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노련한 섭장천이 그런 정도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당은 어쩌면 무인으로서의 욕심도 있었지만 그런 점을 노렸을 것이다. 그와의 생사결에서 이긴다면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이고, 설사 진다해도 육능풍과 진독수가 있었다. 한번 승부를 받아들인 자가 또 다른 상대가 도전하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이다. 자칫 시간을 끌면 어떤 상황으로 바뀔지 모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리함을 최대한 살려 나가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

풍철영은 좌중이 주시하는 가운데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뇌리에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철혈보를 이용하면 된다. 섭장천이 외부로 나가는 순간 그들 일행과 합쳐질 것이다. 그들은 철개장(鐵鎧掌) 곡첩(曲捷)과 섬도(閃刀) 심홍엽(沈紅葉) 일행을 죽인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 중 구파일방의 무학을 익히고 있는 자들도 섞여 있었고, 구파일방의 인물들을 살해한 자들도 있었다. 구파일방의 인물들도 이용할 수 있었다. 구파일방에서는 자신들의 무학을 익힌 자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었다.

몇 가지 사실만 넌지시 알려주고, 그들의 행선지가 어딘지 알려주면 철혈보와 구파일방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섭장천이 강해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 해도 그 아이가 이곳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선화란 여인을 데려고 오면 일각 안에 이곳을 나가 주시오."

"고맙네."

섭장천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풍철영은 몸을 돌리고 일행들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청산이 푸르른 한 땔감은 걱정 없는 법이오. 늦은 시각이지만 차 한 잔 하시지요."

그들은 풍철영의 말뜻을 알았다. 비록 모종의 사연이 있어 이곳에서는 물러나지만 그 뒤를 도모하겠다는 뜻이었다. 객(客)된 입장에서 주인의 뜻을 따라 주는 것도 예의다. 반당은 성큼 걸어 나와 금적수사 부부의 시신을 양옆구리에 끼었다. 축 늘어진 두 부부의 시신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마노와 담천의 역시 시선을 마주치며 그들을 따라 걸어 나갔다. 하지만 이 운봉소축을 들어 올 때와 나가는 지금의 심정은 전혀 달라 있었다. 그의 표정을 힐끗 본 마노는 그의 생각을 알았다. 그는 이곳을 나가는 순간 어디론가 떠날 것이었다. 섭장천은 분명 이 아이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입장으로는 전면에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는 담천의의 불안정한 등을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간혹 도움이 필요 할게야. 장안의 황가마장에 장삼(張三)이나 개봉 봉취루(鳳醉樓)의 단사(彖辭)란 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게. 두칠이나 원외를 딸려 보내고 싶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네를 위험하게 할게야. 잊지 말게. 그들 두 아이는 믿을 수 있는 아이들이네."

그는 마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암천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담천의는 풍철영을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신검산장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섭장천이 그들 일행을 데리고 신검산장을 빠져 나가는 그 때에 담천의 역시 신검산장을 빠져 나갔다. 다만 다른 것은 방향이었다. 그들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 이제는 알았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은 누군가가 의도했던 그대로의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이제 그의 삶은 그가 결정하는 대로 살 것이다! -
(45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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