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 공격을 받았으니 성에서도 마땅히 포로 반격해야 했다. 하지만 산성에는 거대한 포를 거치할 포루도 없어 아예 커다란 포는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총통이 있긴 했지만 더 긴 사정거리 밖에서 쏘아대는 대포에 대해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장판수는 혼비백산해 흩어진 김돈령과 그의 부하들을 뒤로한 채 성위에 올라 고래고래 욕을 해대었다.
“야, 이 가이삿기들아! 포만 쏘아대지 말고 한 번 쳐들어 와 보라우!”
장판수의 가까이에 있던 성루 하나는 포에 맞아 절반이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서양에서 들여온 새로운 화포인 홍이포를 접한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크게 저하되었다. 적어도 총포에 대해서는 청의 군대보다 앞설 것이라 생각했던 자만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도처에서 기와에 구멍이 뚫리고 포탄에 맞아 죽는 자도 생겼다. 한참 동안 계속되던 포격 뒤 말을 탄 청의 장수 하나가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성벽 아래로 와 유창한 조선말로 소리쳤다.
“조선의 병졸들은 들어라! 구원병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강화도는 이미 함락되었다! 어서 성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을 것이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고?”
적장이 와서 소리친 동성편의 병사들은 그 말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소문은 삽시간에 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면 조선 조정의 절반이 청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화친을 배격한 신하들을 내보내어 항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두청은 서흔남에게 다시 한 번 더 성 밖으로 나갈 것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니되오! 나보고 죽으라는 것이오! 이제 성 밖 사정은 지난번과 다르지 않소이까!”
“혼자 나가라는 것이 아니네.”
“혼자든 여럿이던 아니되오!”
“못 하겠다는 것인가?”
“못하겠소! 차라리 여기서 죽이던가 하시오!”
서흔남은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다며 훽 하니 등을 돌려 버렸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두청은 한 마디를 외쳤다.
“임회를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나?”
임회는 광주 목사로서 이괄의 난 당시 남한산성의 축조를 명받고 있었는데 반란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은 인물이었다. 서흔남은 멈춰 서서 코웃음을 치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일로 날 협박하려 드는 것이오?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인데?”
“협박이라니 당치 않네. 단지 그를 죽인 자를 평안감사가 알고 있다는 것이지!”
“그런 일을 평안감사가 어찌 안단 말이오?”
“일전에 출성 했을 때 평안감사를 만난일이 있었네 그때 모든 일의 전말을 알린 글을 남겨 놓았지.”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서흔남은 정말로 갈 요량으로 발걸음을 떼었지만 두청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살길을 만들었지만 이 전란이 끝나도 너는 역적으로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허나 지금 나가 내 말대로 하면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 어찌 하겠는가?”
서흔남의 발걸음이 멈추고 고개가 잠시 숙여졌지만 여전히 몸은 두청을 등지고 있을 뿐이었다.
“내게 성을 나갈 묘한 계책이 있는데 어찌 이는 듣지 않고 죽을 것이라고만 하는가?”
서흔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디 그 묘한 계책이라는 것을 들어나 봅시다.”
두청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리며 승복에 먼지라도 묻었는지 손으로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털어내었다. 그러자 두청의 옷소매에서 하얀 것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사금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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