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완행버스의 추억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11)

등록 2005.05.18 12:42수정 2005.05.1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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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달렸던 시골버스


원주-횡성 간 시내버스
원주-횡성 간 시내버스박도
미루나무 가로수가 이열종대로 쭉 뻗은 신작로를 시골 완행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시골완행 버스는 길손이 갓길에서 손만 들면 아무 데서나 세워준다. 버스 안에는 언제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좌석 한두 곳은 스프링이 튀어나와서 바지를 찢기도 한다.

그 시골버스를 타고서 장에 간 어머니도 돌아오고, 군에 간 오빠도 휴가를 받아 돌아왔다. 어머니 장보따리에는 꽃신도, 치마저고리 감도, 고등어자반도, 구리무도 들어 있었다. 휴가 온 오빠의 가방에는 오빠가 어린 조카나 아우에게 주려고 아껴둔 건빵도 들어 있었다.

이 버스에는 사람만 타는 게 아니었다. 장날이면 마당새(닭)도 강아지도 타고, 마음씨 좋은 기사를 만나면 돼지새끼도 새끼줄에 묶인 채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장으로 가는 버스에는 곡식자루와 푸성귀뿐 아니라 계란꾸러미에다 왕골돗자리, 새끼타래 등 온갖 수공예품도 다 실려 나갔다.

해질 무렵 돌아오는 버스에는 장에 있던 물건은 다 실려 있었다. 지난날 시골완행버스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시골사람들의 애환을 실어 날랐다.


이나마 버스라도 들어가는 마을은 제법 큰 마을이었다. 그렇지 못한 산동네는 장날이면 새벽밥을 먹고 나섰다. 그래서 장날 아침녘이면 골마다 길마다 흰옷 입은 사람으로 줄을 이었다.

차츰 길이 포장되고 자동차문화가 발달하자 웬만한 시골 산촌마을에도 하루에 한두 차례씩 버스가 들어왔다. 그러자 장에 가거나 면사무소에 갈 때 걸어가는 사람이 부쩍 줄어들었다. 대부분 시간 맞춰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하다못해 경운기라도 타고 다녔다.

교통의 발달은 사람들을 편케 하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넉넉했던 시골 인심을 사라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지난날에는 푸성귀를 장날에만 내다팔았다.


그래서 장날이 아닌 날에 딴 오이나 호박, 가지 등 푸성귀는 이웃 간에 나눠먹거나 서로 물물교환을 하였는데, 이제는 교통의 발달로 무시로 도시로 나가서 팔 수 있게 되니 한 푼이라도 현금화하는 게 생활의 한 패턴이 되고 말았다. 이웃 간 오고가던 거래가 점차 뜸해지자 자연히 인정도 메말라 갔다.

대중교통의 위기

여태 운전면허증이 없는 나는 안흥으로 내려온 뒤 자주 시골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강원도 산골 마을에도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면서 달리는 시골버스는 거의 없다. 웬만한 산마을에 이르는 오솔길조차도 대부분 포장돼 있다.

요즘은  웬만한 산골마을에 이르는 길도 모두 포장이 되었다.
요즘은 웬만한 산골마을에 이르는 길도 모두 포장이 되었다.박도
지난날 시골버스는 걸핏하면 고장이 났던 고물이었는데, 요즘의 시골버스는 도시버스 못지않게 산뜻하고 차 안도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어제는 원주에 볼 일이 있어서 횡성-원주 간 버스를 탔다. 이곳에는 여태 교통카드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다. 요금이 1480원이라고 했다.

주머니를 다 뒤졌으나 잔돈이 1400원밖에 없다. 기사에게 사정을 말하면서 나머지 돈은 다음에 만나면 드리겠다고 하자 생면부지의 기사가 그러라고 하였다.

원주에서 두어 시간 남짓 볼 일을 보고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탔더니 천만뜻밖에도 두어 시간 전의 그 기사였다. 먼저 젊은 기사가 나에게 아는 체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도 반갑게 답례를 하고 바로 그의 뒷좌석에 앉았다. 기약 없이 한 약속을 금세 지켰다.

그런데 시골완행버스를 탈 때마다 느낀 점은 승객이 너무 없어서 이나마 거미줄처럼 편리하게 연결된 버스 노선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염려다. 한 번은 강화도에서 시골버스를 탔더니 버스 옆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붙어 있었다.

"존경하는 강화군민 여러분! 강화군민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자가용 이용 증가로 대중교통의 경영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강화군의 교통발전을 위하여 대중교통을 생활화합시다."

어디 강화도만 그러하겠는가. 전국 어디나 비슷할 게다. 차내 손님이 거의 없고 도로도 한가한 시간이라서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채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줬다.

벌써 오래 전부터 시골완행버스는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지만,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버스회사의 수지 부족분은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메워주는데 언제까지 그럴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난 해 초, 미국 워싱턴에서 한 달 보름 정도 지내보니까 자기 차가 없는 사람은 교통이 무지 불편하였다. 한국과 같은 편리하고 값싼 시내버스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영문을 동포에게 물어봤더니,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신발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너나없이 소유하고 기에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승객이 별로 없어서 대중교통용 버스가 드물다고 했다.

이런 현상이 미국만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에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요즘 시골 집에도 대부분 자가용 승용차 아니면 트럭이라도 있다. 젊은 사람들이 있는 집은 더욱 더 그렇다. 버스를 타고 보면 승객 대부분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니면 어린이들이다.

시골사람들도 도시사람 못지않게 자동차 문화를 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온 산골 마을에도 자동차가 누비고,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이 맑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자동차 바퀴에 야생동물이 무참히 깔려 죽는 현실에, 나는 기우(杞憂) 자가 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우리가 편해지는 만큼 자연은 멍들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다 그렇다. 우리가 편해지는 만큼 다른 역작용이 있기 마련인 게 세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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