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미륵산의 털보 화백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10) 원주시 귀래면 박명수 화백

등록 2005.05.16 14:39수정 2005.05.1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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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하정 박명수 씨
하정 박명수 씨박도
봄비가 촐촐히 내린 다음 날의 신록은 더 눈부시게 싱그럽다. 거기다가 뒷산에서 뻐꾸기 울음이 한창인 계절이다. 어디론가 떠나고픈 역마 끼가 발동했다.

마침 치악산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화폭에 담는 박명수 화백이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초대한 적이 있기에 그를 찾아 나섰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서자 차창에 지나치는 산과 들 언저리의 신록들이 까무러치게 아름다웠다. 내가 화가라면 아마도 녹색 물감을 가장 많이 썼을 것이다.

어느 화가는 소녀 시절 배춧잎 빛깔에 반하여 화가가 되었다는데, 이즈음의 신록의 빛깔은 그 기분을 이제야 알 듯하다. 초록은 보면 볼수록 눈의 피로를 씻어주고 정신을 맑게 해 준다. 산과 들의 풀과 나무들이 초록색임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차창 밖의 신록에 취하여 두리번거리는 새, 아내의 차는 원주시내를 우회하여 중앙고속도로 남원주 나들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곧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나오고, 조금 더 달리자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관’이 나왔다. 그곳은 지난 가을에 들렀기에 그냥 지나쳤다.


곧 원주시 남쪽 끝 마을 귀래면이었다. ‘귀래(貴來)’란, ‘귀한 손님이 오셨다’는 뜻인가 보다. 나중에 박 화백이 들려준 지명 유래에서 알았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준 뒤, 이곳 미륵산(689미터)의 고자암에서 시름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기에 이런 지명이 붙었다고 했다.

마침 점심때라서 면사무소가 있는 데서 간단히 자장면으로 요기를 했다. 집으로 초대 받아서 가거나 손님을 초대할 때, 가장 거추장스러운 게 끼니다. 손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고 미리 그런 사실을 통보해 주는 게, 기본 예의이리라. 사실 집에서 손님을 위해 밥 한 끼 준비하려면 얼마나 신경이 쓰이며 번거로운가.


'차 향이 있는 미술관' 주인
'차 향이 있는 미술관' 주인박도
곧 백운산 줄기 미륵산 아래인 황산마을이 나왔다. 마을회관 옆에 나지막하고 예쁜, 그림 같은 집 사립문 앞에 황토색 우체통과 ‘차 향이 있는 미술관’‘하정화숙’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자동차 소리와 인기척을 듣고서 미술관 주인 박명수(53) 화백이 허리 높이의 낮은 사립문을 열고 미소로 반겼다. 그의 작업실과 살림집, 텃밭을 두루 살핀 뒤, 봄볕이 좋은 툇마루에 앉았다.

작가가 작품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 왜 도심을 떠나 시골에서 사십니까?
“원래 제 고향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시골입니다. 해남에서 목포로, 광주로, 서울로, 원주로, 전전하다가 10여년 전 이 황산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작품은 대도시에 있어야겠지만, 작가는 작품 뒤에 있어야 하지요.”

'작가는 작품 배경이 되는 곳에 살아야하고, 작품에 앞서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연 설명이었다. 그의 말에서 한 수 깨우쳤다. 이어서 그가 한 말, ‘작가가 작품 앞에 나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이 모두 나에게는 금과옥조로 들렸다.

- 붓을 쥐게 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제 어머니와 맏형(초암 박인수)입니다. 어머니는 자주 태몽을 이야기하셨는데, 어느 날 밭을 매는데 산 너머 하늘에 북새(저녁놀)가 환하여 호미를 들고서 그곳에 갔더니, 큰 감나무에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더랍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 빛은 나무를 둘둘 감고 있는 큰 뱀에서 나오더랍니다. 어머니가 말씀 하신 그 저녁놀은 늘 제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화실 '하정화숙' 앞에서
화실 '하정화숙' 앞에서박도
젊은 날 한때 붓을 던지고 니체의 세계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인생의 최절정기에 저녁놀이 만물을 금빛으로 물들일 때, 자살하는 사람’이라는 대목에 천착한 적이 있었어요. 다시 붓을 든 뒤에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의 영혼을 금빛으로 물들여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형은 당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대신 저에게 붓을 쥐게 해 준 분입니다. 그래서 형의 권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지요. 그런데 제가 사춘기인 고교 시절에 흔들렸습니다. 저희 형제가 칠남매였는데, 바로 위의 형과 누나가 모두 미혼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아버님도 자식을 잃은 상심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돌아가시게 됐어요. 갑자기 한 집안이 풍비박산된 거죠. 그림은커녕 먹고 살기에 바빠서 붓을 던지고 생활전선에 나섰어요."

그는 이 대목에서는 목이 메인지 잠시 말문을 닫았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잠깐 집안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고는 다시 툇마루로 돌아왔다.

‘예술’은 삶이다

- 다시 붓을 쥐게 된 경위를 들려주세요
“먹고살기 위해 온갖 막일을 했지만 틈틈이 화구를 들고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어느 날 전남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오승윤(오지호 화백 2남) 교수가 캔버스를 저에게 주면서 격려해 주더군요. 그 순간 다시 진학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화가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어떤 소명감이 불꽃처럼 일어나더군요.

또 1975년, 그러니까 제 나이 이십대 초반경이었습니다. 진학을 포기하고 한참 가난과 예술에 대한 좌절로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씨알의 소리>는 제가 즐겨보던 잡지로 함석헌 선생님을 알게 되었으며, 편지를 올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얇고 하얀 종이에 푸른색 만년필 글씨로 ‘늘 내 의지를 지구의 중력처럼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라’고 답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선생님 댁으로 찾아뵈었더니, 마루 위에 하얀 종이학이 매달려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두 분 선생님의 격려에 용기백배하여 다시 붓을 잡고자 미술대학(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하였지요.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라서, 한 학기 공부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한 학기 쉬고… 10년만에 졸업하였습니다.”

손수 칠하였다는 황금빛 화실 지붕
손수 칠하였다는 황금빛 화실 지붕박도
- 가장 즐겨 그리는 화제(畵題)는 무엇입니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곧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눈이 있기에 보지 못하는 세계를 그리고자 합니다. 낮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밤의 세계와 같은 것입니다.”

- ‘예술’이란 무엇입니까?
“‘삶’, 그 자체입니다. 삶의 사명감이라고 할까, 삶의 방정식이라고 할까요. 제 스승이신 김옥진 선생님께서는 '예술은 대상의 모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정기를 빼 담은 신성(神聖)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박 화백은 원주에서 살다가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황산마을로 내려 왔다. 막상 이 마을에서 살고 보니까 공교롭게도 당신이 태어난 해남의 고향마을과 흡사한 점이 많다고 했다.

마을이름이 ‘황산마을’로 똑같고, 고향에도 이곳에도 미륵불과 미륵산이 있으며, 고향에는 연(蓮) 방죽이 있는데. 이곳에도 연(蓮)을 뜻하는 하정(荷亭, 박 화백의 호)이 있다고 하면서 싱긋 웃었다.

- 예술가에게는 평생을 이끌어주는 분이 있다는데, 박 화백은 어느 분입니까?
"바로 제 어머니입니다. 돌아가시면서도 태몽이야기를 하시면서 제가 잘 되라고 비셨어요."

어머니를 화제로 한 그림이 두 점 있는데, 한 점은 표구상에 가 있으나 다른 한 점은 화실에 있다기에 거기로 가서 잠시 감상했다. 화제가 ‘어머니의 강’이었다.

마라톤으로 시련 극복

- 청소년 시기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마라톤을 하였습니다. 마라톤을 하면 심장은 뛰지만 머리는 맑아지고 정신 통일이 되더군요. 광주 역에서 송정리 역까지, 산수 오거리에서 무등산 산장까지가 저의 단골 코스였습니다.”

- 그림으로 생계가 됩니까?

그는 직설적인 대답 대신에 인문과학(문학 철학 미술 등)이 외면당하는 현실을 아파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문화민족입니다. 국악 특히 판소리 하나만 봐도 보통 뛰어난 예술이 아닙니다. 서양이 자랑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우리 나라의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제83호)'과 견주어 보면 게임이 안 됩니다.

이런 위대한 문화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현대에 와서 물질에 너무 얽매여 있어요. 물질은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만 목적이 돼 버린 듯해요. 사람들이 진리나 행복을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밖에서 찾으려고만 하니까 사회에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가 횡행하나 봐요.”

미완성 작품 앞에서
미완성 작품 앞에서박도
새벽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면서, 기도가 끝나면 산에 오르기도 하고, 그림이 잘 안 되면 텃밭을 가꾼다고 했다. 이따금 ‘아사회(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임, 박 화백의 문하생 모임)’ 회원들이 찾아주는 게 그지없이 반갑다면서 이태에 한 번씩 전시회도 갖는다고 했다.

그림 구경, 집 구경, 텃밭 구경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새 두어 시간이 지났다. 우리 내외가 떠날 차비를 차리자 옷소매를 붙잡는 것을, “우리 속담에 떠나는 손의 뒷모습이 좋다”고 했더니, 그러면 “다시 만나는 반가움이 더 크다”고 하면서 옷소매를 놓아 주었다.

올 때는 해를 안고 왔는데, 갈 때는 해를 등지면서 원주, 횡성을 거쳐 새말 나들목에서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전재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싱그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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