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83

남한산성 - 개의 혀

등록 2005.05.31 17:08수정 2005.05.3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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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오! 김화에 적 오백여명이 주둔하고 있는데 우리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있소이다!”

거침없이 선두에서 병사들의 진격을 독려하던 장판수는 척후의 보고를 듣고 전령을 보내어 홍명구에게 알렸다. 홍명구는 단호히 명했다.


“김화의 적을 쳐부수고 백성들을 구한다. 모두 진격하라!”

김화의 청나라 병사들은 그곳에 주둔하며 보급과 포로를 관리하는 후방부대였다. 그런 그들에게 조선군의 진격은 뜻밖의 재난이었다. 병장기를 챙겨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모양새부터 어수선하기 짝이 없자 홍명구는 명을 내렸다.

“여기서 쓸데없이 화약과 화살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모두 창과 칼을 들어 진격하라!”

“모두 쓸어버려라!”

조선군은 함성을 지으며 세 갈래로 나뉘어 아직 진열조차 갖추지 못한 청의 군대를 덮쳤다. 수적으로부터도 열세였던 청의 군대는 일거에 무너졌고 조선병사들은 마음껏 치고 베고 찌르며 청의 병사들을 살육해나갔다. 특히 장판수와 윤계남은 경쟁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칼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내래 너 한데 질줄 아네?”
“흥! 저기 도망가는 놈이나 잡게나!”

청의 병사들은 울부짖으며 조금이라도 조선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축들이 있는 우리를 열었다. 수많은 가축들이 몰려나오자 일부 병사들이 이를 잡느라 흐트러졌지만 곧바로 장판수의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가축은 놔두라우! 함부로 대오를 이탈하는 놈은 내래 그만 두지 않갔어!”

본래 엄한 기강 하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이라 그들은 장판수의 말을 헛되이 흘려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이랄 것도 없는 일방적인 살육은 끝났다. 결국 짧은 시각의 단 한차례 격전에서 청의 병사들은 모조리 살육당한 채 일부만 살아 도주해나갔고 조선병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러대었다.

“여기 사람들이 갇혀 있습니다!”

홍명구가 병사들이 가리킨 곳에 가보자 누더기를 걸친 백성 수 백 명이 울부짖으며 걸어 나와 조선군을 맞이했다.

“아이고! 왜 이제야 왔습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은 병사들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렸고 그런 정경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혔다. 차예량이 홍명구에게 나서 말했다.

“바쁜 행군 중에 이들을 데리고 나설 수 없으니 괜찮으시다면 제 수하 병졸 몇 명을 보내어 이들을 산성으로 인도하심이 어떠신지요.”

홍명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여기 있는 가축을 잡아 백성과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남한산성으로 진격하겠다.”

일단 한숨을 돌린 병사들은 불을 피우고 가축을 잡아 저녁을 마련했다. 청나라 병사들이 쓰던 진지가 고스란히 남아 병사들이 먹고 쉬는 데 있어 잡스러운 번거로움이 없다는 게 좋은 일이긴 했지만 홍명구로서는 한 시각이 급할 지경이었다. 이런 조급함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이렇게 잡혀 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나.”
“우리라도 나서 구해야 하지.”

첫 승리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도 높았지만 평안병사 유림은 또다시 홍명구를 찾아가 재차 진격을 멈출 것을 청했다.

“이런 병력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되오. 이만하면 조정에 고할 명분도 섰으니 병사를 돌림이 옳소이다.”

홍명구는 아무 말 없이 유림을 노려보았다. 그것으로 대답은 끝난 것이었고 유림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홍명구의 앞에서 물러나갔다.

“병마사 나으리. 이걸 받으시옵소서.”

어느 사이엔가 유림의 앞에 온 수상쩍은 병사하나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서찰을 전해주고서는 부리나케 달려 나가 버렸다. 천천히 서찰을 펼쳐본 유림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네가 있는 곳은 반드시 죽을 곳이니 어서 살 길을 찾으라고?’

유림의 한숨소리는 무엇이 즐거운지 왁자하게 떠들며 웃어대는 한 무리 병사들의 소리에 묻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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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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