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난 곳은 다르더라도 이곳에 몸담은 자라면 개성상인이 맞다. 비록 도고(都庫)와 같이 독점을 통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고는 하나 후일 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야. 나는 한 번 도박을 해 보려 한다. 홍경래의 난 때도 송상 중 몇이 드러내놓고 거든 바가 있었다만은 그들은 안목이 없었어. 북변이라는 지역적인 한계도 그렇지만 뭐랄까? 시대의식이랄까. 반역의 주체가 농민이나 기층백성이 아닌 몰락양반 세력에다 광산의 부랑유민이었지. 정주성에서 최후를 마친 농민군들은 그저 관군의 보복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홍경래의 무리를 따랐던 사람들에 불과 했느니라."
송상 임헌명의 목소리는 길게 늘어지는 어조를 띄면서도 꼬장꼬장한 기백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 또한 대인 어르신께오서 누차 이르시던 말씀 아니겠습니까?"
"허나 이들은 다르다. 처음엔 권 역관 그 분 하나를 믿고 반쯤만 발을 담가 볼까 했지. 그런데 일이 그렇지가 않았어. 이들은 분명 일을 칠 게다. 아주 크게. 이 나라를 근본부터 뒤집을 법한 대단한 포부로 일어 설 게다."
"어르신께오서 그리 믿으신다면 소인 또한 그렇다 여길 것입니다."
"문길아, 오늘은 그예 네게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구나. 이리 올라오너라."
임헌명이 행수 서문길을 대청으로 불렀다. 집사는 조용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
대청에서 마주한 임헌명은 서문길을 앉혀 놓고 긴 이야기의 앞머리를 시작했다.
3
황해도 옹진.
"죽은 다음에 물에 던져진 자다."
관아 나졸들에게 통부를 보인 우포청 부장 조필두가, 갯가 바위 위로 건져 올려진 청국인의 시신들을 보고 대뜸 내뱉었다.
"그 것을 어찌 아십니까요. 그래도 검험을 해 봐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옹진 현의 포졸이 말했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코를 쥔 채 시신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다른 포졸들은 갯바위 근처로 몰려든 사람들을 밀어내고 통제하느라 분주했다.
"살빛은 문드러져 허옇고, 입은 벌리고 눈은 감았으며, 복부가 팽창하고, 손톱에 진흙이나 모래가 끼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생전에 강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이겠지. 허나 저 자들을 보아라. 배가 불룩하지 않아.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보통 성인남자가 물에 빠지면 대략 두 되 반들이 물을 들이키는 법이거든."
"그래도 시반(屍班:시신의 피가 한 쪽으로 몰려 적홍색으로 물드는 현상)이 없잖습니까. 사후투수(死後投水)되었다면 시반이 있어야 할 것인데…."
옆에 있던 평복차림의 우포청 나졸이 아는 체를 했다.
"예끼, 인석아 포청 밥 먹고 산지 여섯 해가 넘는 놈이… 쯧쯧… 네 놈 말대로 사후투수된 것인지 익사한 것인지 판별하는데 시반이 또 하나의 단서가 됨은 맞다. 시반이 있다면 사후투수일 가능성이 크지. 허나 뭍이나 물이나 체온이 내려간 속도는 같고 시신이 물을 따라 흐를 때에는 자세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시반은 미약하거나 없다. 피가 한 쪽으로 고여 응어리지는 현상은 대개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다."
조필두가 나졸에게 핀잔을 안기고는 시신들 곁으로 다가갔다. 시취가 물씬 났다. 뒤 따라온 포청 나졸은 코로 호흡하기 어려운 듯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시신을 바라본다. 나졸의 얼굴이 영 편치가 않은데 관아에서 나온 나졸들은 아예 그들과 교대하듯 멀찌감치 멀어졌다.
"포말괴(泡沫塊:거품덩어리)만 있다면 의심 없이 생전에 물에 들어갔다는 증거. 미세한 포말로 구성된 백색의 포말괴가 비강 및 구강에서 마치 버섯 모양으로 유출되었다면, 익사 과정에서 폐가 부풀어 폐포가 파열되면서 생긴 것이다. 여름엔 2~3일 지속되고 길면 5일까지, 겨울에는 2~5일 정도에서 길면 8일까지도 남아 있는데 그런 흔적은 보이질 않지? 이 자들은 난파된 배에서 흘러온 자들이 아니다. 배에서 죽은 후 유기된 자들이야."
"예… 그런 듯하옵니다."
"흠… 그런데 대체 숨을 놓은 지 얼마나 된 자들인고…."
조필두가 혼잣말처럼 뇌이며 나뭇가지로 부패한 시신의 이곳저곳을 뒤적였다.
"한 닷새는 넘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필두의 등 뒤에서 나온 소리.
조필두는 날카롭게 뒤를 쏘아봤다. 포졸들이 제지하고 있음에도 구경꾼 사이로 우뚝 나선 초로의 사내가 눈에 띄었다. 그의 뒤로도 같은 행장을 한 젊은이 너덧이 더 있었다.
"누군가?"
조필두는 평복 차림임에도 중인 갓을 쓰고 있는 한 참 연장자에게 다짜고짜 하게를 했다.
"예, 평양 사는 의원 정 아무개라 하옵니다. 이들은 제 의생들입지요."
정현우 의원이 노기도 없이 공손히 하례를 했다.
"예, 나으리 이 분이 평양의 명의로 이름이 높은 정현우 의원입니다요. 저희 고을에 염병이 퍼진 게 아닌가 의심되는 마을이 있어 금번 다니러 왔기로…."
사람을 통제하지 않은 것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옹진 나졸이 나서 얼른 소개를 올렸다.
"그래? 검안에 안식이 있는가?"
"예, 소인이 크고 작은 검안에 간여한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찌 닷새라 추정하는가?"
조필두의 물음에 정현우는 시신의 팔다리 부위를 가리키며 조근조근 말했다.
"물 속에서 일정시간 경과되면 팔다리의 표피, 특히 손발을 비롯하여 무릎과 팔꿈치의 각질층이 물에 부풀어 희어지고 주름이 잡히오. 그 모양이 손에 물을 오래 담구고 빨래하는 여인의 손에서 보는 것과 같다하여 표모피(漂母皮)라 합니다.
지두(指頭: 손가락 끝)가 희어지는 현상이 맨 먼저 나타나는데 여름철에는 3~4경(更)가량 걸리고 겨울에는 3~5일이 걸립지요. 시간이 더 지나면 부패가 되어 표피는 진피로부터 이완되어 허물을 벗듯 손발톱을 포함하여 장갑이나 버선과 같이 벗겨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대개 여름에 5~10일 가량 걸리는데 이 시신들은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분명 닷새 이상이 경과한 시신입니다."
"흠…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군. 그런데 닷새 경이라…? 풍랑도 없었을 뿐더러 익사한 시신은 아니니 필경 난파한 배에서 흘러들어 온 시신은 아니고, 조선의 해역에서 청국인이 살해된 채 바다로 버려졌다는 이야긴데… 그것도 둘씩이나… 혹 다른 시신은 더 없을까?"
"익사 후 바로 부상하는 경우도 2~3할은 되나 대개 부패로 체내에 기체가 차게 되면 떠오르나니 수온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여름에는 2~3일, 겨울철에는 수십 일에서 수개월이 걸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다에서라면 시신이 다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시신이 떠오르는 것은 수심과도 깊은 연관이 있사온데 이렇듯 여름이라면 수심이 한 길 이내일 경우 한 나절에서 반나절 정도만으로도 떠오르길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스무 길 이상이 되면 얘기는 다르지요.
그런 깊이라면 수온이 낮아지므로 부패가 진행되지 않거나 부패기체가 생성된다 해도 수압으로 압축되어 체적(體積)이 증대되지 않기 때문에 부상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얘긴즉슨 이들처럼 바다에 버려진 일행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이들 둘 뿐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허나 제 개인적 소견으론 과연 망망대해에 단 두 구의 시체가 유기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구 모두 같은 장소로 수일을 흘러올 확률은 적을 거란 생각입니다. 필경 다른 시신들도 어딘가에 있겠지요."
"좋은 말이긴 한데, 더 헷갈리는구먼, 에잉."
조필두는 다 듣고 나서 허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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