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84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06 11:34수정 2005.06.0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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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조선 제일의 상업지 개성의 상인들은 시세를 살피고 식리(殖利)를 하는데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도제제도인 차인(差人) 제도나 전국 각지에 설치한 송방(松房)의 운영 등 독특한 상술과 상업 경영으로 의주상인, 동래상인 등과 함께 대외무역을 주도하고 국내상업에서도 경강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개성상인들은 선상(船商), 육상(陸商)과 같은 행상으로 나와 그들만의 활동 거점인 송방을 중심으로 활발히 상품을 유통시켰고 정보를 교류하였다.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 등 거의 전국에 상권이 뻗어 있었다.

개성의 자남산 아랫자락 자남동 기와집. 하얀 베옷에 돋보기를 콧등에 건 단아한 노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조의 1년 경용에 약 11만석의 곡물을 필요로 하는데 상납미가 겨우 9만 석이니 포삼 4만근에서 거둔 세전이, 근당 5냥씩, 세전 모두 23만냥입니다. 곡물 7만 석에 달하는 액이옵니다. 단일 세목으로는 조정의 수입 중 가장 큰 비중이라 아니 할 수 없지요. 당분간 포삼 사업의 전망은 밝으리라 봅니다."

노인의 옆에 앉은 집사가 읊조렸다.

"그렇겠지. 당분간은 그렇겠지."


노인은 여전히 장부에 시선을 응시한 채 감정 없는 음성을 내었다.

"우피와 수달피, 종이, 심지어 제주도에서 나는 갓양태까지 강진, 해남에서 매점하여 대청 무역의 물품을 저희 송상이 도고상업으로 대개 장악하고 있습니다만 이 인삼만한 효자가 없습지요."


"오래지 않을 걸세. 포삼이 지금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꾸준히 우리 손아귀에 있어줄 날이…."

"예?"

개성인삼업으로 굴지의 상단을 일군 노인이 회의적인 말을 내뱉자 집사는 잘못 들었는지 반문했다.

"대인 어르신."

한 사내가 마당으로 접어들자 노인은 복식부기법으로 작성된 개성상인 특유의 장부인 사개송도치부(四介松都治簿)를 가만히 접었다.

"많이 늦었구나?"

들어선 사내를 내려다 보며 아는 체를 했다.

"예. 대인 어르신. 말씀 드린 대로 일이 공교롭게 되어 포삼을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행수 서문길이 공손히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래. 네가 보낸 서신은 엊그제 받아 보았다."

각 송방을 오가는 인편을 통해 급히 전달해야 할 소식이나 전갈이 있으면 언제든 송부가 가능했다. 대동계원들의 수시 연락도 대다수가 객주와 송방으로 연결된 거미줄 같은 통신망으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남은 포삼은 다 처리하였느냐?"

"예, 값이 헐하기는 하였사오나 처분을 하여 거래지(去來紙: 어음)로 바꿔왔습니다. 이제 곧 우기(雨期)이옵고, 삼을 지니고 예까지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지라…. 혹 가져왔다 해도 그 많은 물량의 보관타 보면 잡음이 일까 저어하여…."

"그래 잘 하였다. 그만한 임시 변통 권한도 없어서야 어디 송방 임헌명의 행수라 말할 수 있겠느냐. 굳이 내 전갈을 고대하지 않고 임의로 일을 처리한 것은 잘 한 일이야. 그러잖아도 타지에서 온 똥파리가 두엇 개성에 묻어든 것 같다는 풍문이니. "

"또 말입니까?"

"지난 번 경포교들이 밀포삼을 적발한 이래론 아주 단 맛을 들였는지 심심찮게 내려오는구나. 기왕 돌아 왔으니 괜한 꼬투리 잡히지 않게 집안 단도리를 하거라."
"예, 어르신."

"그나저나 그런 변고가 있었다는데 별 일은 없었느냐?"

임헌명이라는 노인은 그제서야 서해안에서 있었던 싸움에 대해 물었다.

"예, 애시당초 호위는 광산 쪽에서 맡기로 하였기에 제 쪽 인원은 몇 타지도 않아, 인삼 몇 덩이가 싸움에 상한 것 빼고는 별 피해는 없었습니다. 하온데…."

"그런데?"

"이쪽 사람들 중 하나가 죽고 두엇이 다치기는 하였으나 수적(水賊)으로 보이는 황당선은 괴멸을 면치 못하였사옵니다. 수적들은 마흔 넘는 인원 중에 반이 넘어 죽었사옵니다. 운산 장정들 이야기야 익히 들은 바가 있사오나 상대가 청국의 무장한 수적(水賊)일진대 결과가 참으로 황당합니다."

서문길은 다시 상기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 듯 얼굴을 찡그렸다.

"배는 어찌하였느냐?"

"그들 배에 선재된 화약으로 격침하였사옵니다."

"우리 삼을 다시 찾은 것으로 끝인가?"

"은궤를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포삼 대금으로 왕 대인이 준비 한 것을 수적이 가로챈 후 내처 인삼을 노려 조선으로 들어온 듯 합니다. 수적 중에 왕 대인의 선인이 있었습니다. 그 자로 인해 수적들이 저희들과 약조된 신호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글쎄…. 정말로 수적인지, 왕 대인이 수적을 시켜 인삼을 빼앗아 오라 하였는진 알 수 없지."

오랜 세월을 노련한 감각으로 살아온 사람의 눈매가 서걱 빛났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운산 쪽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지요? 나름으로 큰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들이고 어르신께서도 물심으로 그네들을 성원하는 것까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온데 막상 그들의 위용을 보니 순리 안에서 권모술수로 취하는 바를 얻으려 하는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아까 말씀드렸듯이 수적이 저희의 신호까지 알고 끌어 들였음에도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이 상대를 전멸시켰음이 제 일이요, 양이들이나 싣고 다닌다는 터지는 화포를 달고 있었음이 제 이요, 호위에 나섰던 장정 개개의 화기가 우수함과 그 동작의 기절함이 제 삼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그 운산 물주의 자제가 일개 호위대의 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며 거기에 나선 장정들이 운산 물주가 기르고 있는 장정의 전부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배에 있는 선원들과 호위 장정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따로 길러진 자들이 적실하며 그들은 그 무리들 중 극히 일부임이 확실합니다."

"문길아."

이야기를 다 들은 노인이 서문길을 다정하게 불렀다. 사십이 넘은 서문길이 마치 아이처럼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예, 어르신."

"우리 개성사람들이 이렇게 셈속이 밝고 단합이 잘 되는 연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고려 왕조의 도읍지 사람들이 살아갈 방법이란 게 천한 장사치 일 밖엔 없지 않았겠느냐. 이곳 개성에서 삼포농업이 번성하게 된 것도 토양이 비옥하다거나 인삼의 생육형질에 적합해서가 아니었느니라. 살아 남기 위한 개성인들의 땀의 결실이었느니라. 정치적인 진출이 허용되지 않으니 상업으로 매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대인 어르신. 저 또한 이곳 개성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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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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