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 도(海島)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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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변 객주.
아침부터 바닥을 다 파헤칠 요량으로 세차게 들이 붓던 비가 잠시 눅었다. 내리는 듯 그친 듯 뿌리는 물기 사이로, 이제 신록이라 말하기 민망한 녹음이 짓무를 듯 푸르렀다.
"이쯤 되면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평양 객주의 안마당 처마에서 이경은이 우장을 챙기며 말했다.
"고맙소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권기범이 댓돌 아래로 따라 내려서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당치 않습니다. 다른 한 분은 손도 써보지 못했는걸요. 의술을 알아갈수록 인명재천(人命在天)이란 말을 절감할 뿐입니다."
이경은이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한 채 먼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오. 그 사람은 떠날 때부터 살기가 어렵다 여겼던 사람이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의원께 데리고는 왔으나 방법이 없음은 가히 짐작하던 바요. 여하튼 남은 한 사람이라도 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다 이 의원의 은공이오."
권기범이 말했다.
대동강 어귀에서 흑호대원과 수돌이를 사후선에 싣고 죽을힘을 다해 저어왔으나 평양에 다다랐을 때 이미 흑호대원은 출혈이 심해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사람을 둘씩이나 데리고 성 안을 들어갈 방법이 없어 일단 객주에 거처를 잡고 정 의원의 약국을 찾아 의원을 대동한 것인데, 가망이 있는 수돌이를 먼저 수술하느라 흑호대원은 뒤늦게야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늦은 수술 후에 눈을 뜨지 못했다.
"스승님만 계셨더라도…."
이경은이 눈을 감으며 자책했다. 하필 스승이자 장인인 정현우 의원이 황해도 쪽 돌림병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 스승님이라면 능히 그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 경은은 생각했다.
"이 의원 자책하지 마시오. 스승께오서 얼마나 명의인 줄은 모르겠으나 사태를 바뀌기란 쉽지가 않았을 겝니다. 이 의원의 집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총상에 그만한 조처는 없으리란 생각이 듭디다. 서양 의원도 내장을 다치지 않고 옆구리에 박힌 총환을 빼내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저 아이를 살린 건 다 이 의원의 의술 덕이오."
"필요한 약재는 처방을 해 놓았습니다. 지난 닷새를 잘 넘겼으니 상처가 곪지는 않을 겝니다. 그저 안정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권기범의 말을 인사치레로 흘려들었는지 이경은은 도롱이를 걸친 어깨위로 삿갓을 눌러 쓰며 마당으로 나섰다.
"의원님을 약국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해라."
권기범이 호위 하나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번번이 그렇게 수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당에 선 이경은이 뒤도 보지 않고 말했다.
"그저 고마운 성의일 뿐입니다. 이이가 쾌차만 한다면 충분한 사례는 해 드릴 것입니다."
의원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권기범이 여지를 남겼다.
"이미 받은 은자로도 약값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일일이 그렇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관아에 발고를 할 터였으면 벌써 했겠지요. 이렇게 며칠씩이나 두고 있었겠습니까?"
권기범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눈치 챈 이경은이 안심인지 짜증인지 모를 말로 대답했다.
"그것이 이상하단 것이오. 두 사람이나 총환에 상했고 그 중 하나는 죽었소. 이런 중대 사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소? 어찌 그 소종래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게요?"
"무슨 연유가 있었겠지요."
여전히 이경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비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서도 권기범의 키에 미치지 못한 체구였다. 그러나 젊은 나이와 작은 체구에 비해 내뿜는 기운이 녹녹치 않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그리 초연하시오?"
이번엔 권기범이 마당으로 내려서며 물었다. 안개만큼이나 가늘게 뿌려지는 빗물에 콧등에 와 닿았다. 신선했다.
"꼭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번의 일은 대강 짐작이 되어서요. 그 이상의 것은 궁금해 한들 말을 해 줄 리도 없을 터이고…."
"대강의 짐작이라?"
"환자는 둘 다 양총에 맞았더군요."
"그걸 어떻게?"
"환부를 보면 강선이 있는 총에서 나온 총환에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승총에선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형상이지요. 두어 달 전에 안주에서 강선이 있으면서도 양총이 아닌 독특한 총상의 흔적을 본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환부는 틀림없는 양총의 흔적이지요."
"그래, 양총에 맞았다 칩시다. 그것이 대강 짐작의 전부요?"
"허허허. 양총에 맞은 이들이 대동강을 통해 평양에 닿았습니다. 더구나 약국이 있는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따로 사처를 잡아 의원을 부른다면? 그럼 얘기 다 한 것 아니겠소. 분명 이양선이나 황당선과 교역하는 무리들 중 하나였을 터이고 무엇인가가 잘 풀리지 않아 그들에게 화를 입은 것이 아니겠소? 총상을 모두 정면에서 입은 것으로 보아 관군에게 쫓기다 그런 것은 아닌 것은 아닐 테고."
"그러니, 우린 밀무역을 하는 적당이다? 그러니 굳이 의원이나 백성과 이해관계가 얽힌 몸도 아니니 구태여 관까지 끌어들여 일을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로군?"
"이를테면 그렇지요."
"흠, 영특한 발상이오. 그저 짐작한대로만 믿으시구려. 입만 다문다면 아무 일 없을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녕히 가시오. 내일도 혼자 오셨으면 하오."
"글쎄요. 스승님께서 돌아오시면 한 번 모시고 오려 하였습니다만."
"그것까진 좋소."
이경은이 대답을 듣고 돌아섰다. 나름대로 무리의 본색을 짐작하고도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마당을 혼자 나서는 이경은을 보며 호위가 권기범의 눈을 응시했다. 저 자를 혼자 보내도 되겠냐는 물음.
권기범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위인은 아닌 것 같다.'
마당을 가로 질러 대문을 나서던 이경은이 한 마디를 했다.
"댁네들 품속에 있는 것이 수발총(燧發銃:부싯돌 점화식 총, 대개 권총류을 일컬음)이 아닌지요? 좀 더 깊숙이 동여매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에 두 호위가 화들짝 가슴께를 가렸다. 대문을 빠져 나가는 이경은을 보고 권기범이 읊조렸다.
"하늘이 내는 인재는 본디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임이 적실하다. 사람이 스스로 신분이 어떠함을 따지고 가문이 어떠함을 따져 하늘이 내린 인재를 버려 쓰면서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이경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멀리 모란봉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안개비에 가린 탓에 모란봉과 부벽루의 자태는 볼 수는 없었으나, 문득 정지상의 '송인(送人)'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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