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평양 아주머님은 작은 아들이 곁에 있잖아요. 참 총명하고 똘똘해 보이던데."
처자가 나이 든 아낙의 관심사를 돌렸다.
"그래, 수항이 그 놈이 기특하고 영리한 건 지 애비를 쏙 빼닮았지."
나이든 아낙은 평양 유기전의 안주인 평양댁이었다. 남편을 잃은 지 겨우 두 달째지만 평소 억척스러운 기질과 활달함으로 광산 마을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씨는 애는 없으신가봐요? 서방님 신수는 훤해 보이던, 흡…."
판개의 처가 마주 앉은 처자에게 묻다가 옆구리를 뒤틀며 말을 맺었다. 평양댁이 엄지로 판개 처의 허리를 꾹 찌른 탓이었다.
"괜찮아요. 아주머니. 과부인 게 어디 죄인가요?"
처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양댁에게 말했다.
"죄만스럽네요. 전 속도 모르고 그만…."
판개 처가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말씀을…, 여러 해 전 집안에 우환이 있어 서방님과는 사별하게 되었어요. 종종 제 옆에 계시던 분은 시동생이신데 우환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붙이지요. 그리 오해하실 만도 하실 겝니다."
"여하튼 제 입이 방정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씨."
"정말 괘념치 않는대도요. 그리고 아우라 불러 주세요. 이곳은 반상의 구분도 없고 인간에 귀천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비록 맡은 역할에 따라 직책의 차이는 있을지라도요. 그러니 앞으론 저를 소홍 아우라 불러주세요. 저도 해주 형님이라 부를테여요."
"그… 그래도, 막 그러기가…."
"아이, 괜찮대두요. 괜찮은 게 아니라 그리 따르지 않으면 이 마을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니 이곳을 떠야 할지도 몰라요."
처자가 연신 살갑게 자신을 숙였다. 짐짓 엄포를 놓는 척도 했다.
판개의 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광산 마을에선 양반과 상민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하나 판윤을 지낸 가문의 며느리에게 하대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양반집 규수가 자신과 똑같이 앉아 탄환을 제조하는 막일을 한다는 것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서방을 따라 광산 마을로 들어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이 같은 일감을 잡은 것도 천만다행이었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상하 구분 없이 동기간처럼 지내는 것도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마을에 권 역관이라는 촌장이 있어 대외적인 문제에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기는 하나 마을의 대소사는 마을 장정들이 공론하여 처결하는 듯 했다. 단오 명절에 대한 계획도, 가을 추수에 대한 분배도 마을 장정들이 향소에 모여 협의하고, 모든 일은 협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상스러운 마을이긴 하였으나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배 부르고 등 따스한 삶이 무엇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신 해주 형님도 오늘부턴 저녁에 학당엘 나오셔야 해요."
판개의 처가 한참을 골똘하게 생각하는데 소홍이 말을 걸었다.
"아낙이 글을 배워 뭐에 쓰게요…."
판개의 처가 가당찮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글이 아니고 언문이예요. 글을 알면 앉아서도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고, 누천 년 전의 고인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답니다. 그러니 글을 익히셔요."
"그럴 거면 제 자식들이나…."
"물론 아이들은 낮에 학당에서 배우지요. 밤엔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 든 어른들을 대상으로 가르칩니다. 같이 하셔요."
"그...그럼 생각할 여유라도 좀....."
"아휴, 생각할 게 뭐있어 그 대가리에 생각이랍시고 해봤자 서캐밖에 더 떨어져. 잔말 말고 오늘부터 나와. 이 늙은 것도 배우는데 젊디 젊은 사람이!"
평양댁도 거들어줬다.
"어머? 형님도요? 그 연세에 글을 배워 어디에 쓰시려고…."
"아, 어디에 쓰긴. 하다하다 쓸 데 없으면 아들하고 서간이라도 주고받지 뭘."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평양댁 입에서 서간이야기가 나오자 판개 처의 표정에서 화색이 돌았다. 엊그제 판개가 집에 들렀을 때 단 보름간 짬짬이 익힌 솜씨라며 언문으로 판개가 제 이름과 노모, 아내, 자식들 이름을 죽 써주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했었다. 모든 개화군은 언문 쓰기와 읽기가 필수라 했다.
"그래요. 개화군에 나가신 서방님과 서찰을 주고 받을 수도 있어요."
소홍이 이렇게 말하며 판개 처를 빤히 쳐다보았다.
판개 처가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판개 처의 승낙에 세 사람이 좋아라 하고 있는데 누가 평양댁을 불렀다.
"아니? 수항아 네가 이 시각에 웬일이냐?"
평양댁이 군기창에 있을 작은 아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예, 스승님께서 여기 제조소에 짐을 날라 드리라 하기에."
"아휴, 그래 내 새끼 그 짬을 타고 에미 얼굴을 보려고, 에이구 내 새끼."
평양댁이 수항을 끌어안고는 어깨를 도닥였다.
"실은, 어머님도 어머님이지만 소홍 아주머니께 전갈이 있어서."
"응? 내게?"
"밖에서 홍 물주 나으리가 뵙자 하십니다."
수항은 홍윤서가 부른다는 말을 전했다. 병영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부영수라는 직함을 모른 채 그냥 물주로 싸잡아 불렀다. 워낙 여인들만 작업하는 공간이라 홍윤서는 안으로 들지 못하고 꼭 누구를 시켜 필요한 말을 전했다. 십오 세의 수홍은 아직 소년 취급을 하는지 흉허물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서방님이?"
소홍은 홍윤서를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아직 미장가니 도련님이건만 이미 나이가 자기보다도 넷이나 많고 무리를 이끄는 부영수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쉽게 부르기가 어려웠다.
소홍이 말고 있던 한지를 내려 놓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루한 작업용 앞치마나마 한 번 더 털어주고 머리를 매만지며 밖으로 나섰다.
평양댁이 소홍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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