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203회

등록 2005.06.20 07:56수정 2005.06.2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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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다는 것은 분명 나쁜 짓이었다. 상대의 물건을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몰래 빼앗는 이 행위는 고래로부터 엄격하게 치죄할 만큼 나쁜 행위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거짓말과 함께 훔치는 것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나쁜 짓이라 가르쳐왔다.

그는 나쁜 짓을 했다. 그것도 여염집도 아닌 사찰에 들어가 승복을 훔쳤다. 승복을 훔쳐야겠다는 생각은 그가 산속에서 홀로 지낸 이십 여일이 지난 후 용화사를 다시 들렀을 때 생각한 것이었다. 이미 암자는 불타 깨끗하게 사라졌고, 모든 것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하지만 인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스님들이 탁발(托鉢)을 나갈 때 쓰는 사립과 함께 승복을 가져왔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최선의 변장술이었다.


사립에 어설픈 승복을 입은 그는 마치 자신의 변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개봉의 저잣거리로 향했다. 이십일 동안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 그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부친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것 보다는 알고 있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것이 훨씬 나았다.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소식(小食)과 고요함은 그의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그리고 뚜렷하게 그가 할 일을 결정하게 했다.

강중장군의 죽음은 그에게 주어진 끈 하나가 끊어진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한 끈이었고, 그 끈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두 개의 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끈은 이미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튼튼한 끈이었지만 그 끈은 그를 위로 올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끈이었다.

(우교(偶矯)란 인물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그를 찾을 수 있으랴. 이미 섭장천과 마노의 대화로 비추어보면 그를 찾기란 극히 어려울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것도 매우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였다.


그가 필요한 것을 가진 인물은 이 중원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아주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곳. 구파일방 중 개방이나 철혈보라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만박거사나 천지회의 유곡을 찾아가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가는 즉시 자신은 비원에 노출될 것이었다. 그래도 비원이라면 귀찮은 일이 발생하기는 해도 안전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신검산장을 나오자마자 그를 노렸던 미지(未知)의 인물들이었다. 이곳 개봉의 옷가게에서 그를 기습했던 자들, 그리고 용화사의 모든 인물을 죽인 그들… 그들은 또 다시 자신을 노릴지 몰랐다. 일단 그들이 누군지 파악하는 것도 급선무였다. 그들이 만약 자신을 노리는 이유가 부친의 일과 관계된 것이라면 우교를 찾을 필요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인물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장안의 황가마장에 장삼(張三)이나 개봉 봉취루(鳳醉樓)의 단사(彖辭)…!)

마노가 급하면 도움을 받으라고 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찾아가면 자신은 이미 사라졌다지만 아직 존재하고 있는 균대위의 인물들에게 자연스럽게 노출될 것이다. 그것을 노리고 마노가 말해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들 역시 안전하다고 보장받을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곳은 개봉이었다.

봉취루의 단사란 인물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잣거리로 나온 것인데 이미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라 붙고 있었다. 확실치는 않으나 느낌은 분명했다. 그는 고의로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걸었다.

(그들일까?)

자신을 노렸던 자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산에서 내려와 개봉에 들어 선지 겨우 반시진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각에 자신을 파악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뒤를 쫓는 자들도 여러 명인 것 같았다. 또한 다른 부류인 것도 같았다. 귀찮은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이대로 단사란 인물을 찾아가게 되면 강중장군의 경우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는 좁은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미행하는 자가 있다면 분명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사립 사이로 뒤를 보았다. 위치와 방향은 틀렸지만 세 명의 움직임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일정거리를 두고 따라 오는 두 명의 거지는 조금 전에도 본 것 같았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그가 골목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한쪽에 세워져 있던 마차가 움직이면서 골목 담장을 들이받으며 부서졌다.

히이잉--- 와작---

아마 서 있던 말이 무엇인가에 갑작스럽게 놀라 뛰어 나가다가 담 모서리에 마차가 걸렸던 모양이었다. 마부는 삼십대 중반의 왜소해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말들은 놀라 울부짖고 마차는 이미 한쪽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차가 부서지자 그가 들어 온 골목길의 입구는 막힌 상태가 되었고, 그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아무도 골목길로 들어 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뒤쫓고 있는 자들을 따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빠르게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은 얼마 안가 우측으로 굽어져 있었는데, 큰길로 통하는 입구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곳에는 골목길을 들어설 때 마차가 부수어져 입구를 막고 있는 것과 같이 멀쩡하게 생긴 마차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아니 골목 입구를 막고 있었지만 마차의 문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 열려 있었다.

"……!"

담천의는 그 마차를 금세 알아보았다. 꽃무늬가 되어 있고 장식이 화려한 마차. 다관에서 몽화를 만날 때 그 입구에서 보았던 그 마차였다. 그가 주춤할 즈음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그의 고막을 울렸다.

"어서 타게. 조금 더 지체하면 귀찮은 파리 떼가 들끓게 될게야."

순백색의 대완마(大宛馬)를 끄는 육순 가량의 노인은 물론 추혼귀견수(追魂鬼見手) 하공량(厦公亮)이었다. 담천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변장을 하고 내려와 알아 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공량은 이미 자신이 올 길에서 미리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체 없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한 여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 다관에서 몽화와 같이 있었던 네 여인 중 한명이었다. 마차는 그가 오르자 곧 바로 출발했다.

"자넨 참으로 노부를 귀찮게 만드는 사람이군."

마차가 세차게 달리며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담천의의 귀로 들어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려 변장을 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변장을 한 것인가? 세상에 그걸 지금 변장이라고 한 것인가?"

앞에 앉은 여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 헐렁한 승포를 걸치고 사립을 쓴 모습이 우스웠던 것 같았다. 변장을 그럴 듯 하게 한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사립을 벗었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겠소?"

"자네 모습을 알고 있다는 죄로 노부는 이 개봉 전역을 이십여 일 동안 돌아다녀야 했네. 또한 자네 덕분에 백삼십이 명의 아무 상관없는 놈들의 상판 떼기를 확인해야 했지. 자네가 개봉에 나타나는 그 순간부터 자네 뒤를 쫓았던 자들이 몇 명인지 알겠나?"

"모르오."

"몰랐겠지. 아는 놈이 그렇게 태연하게 저잣거리를 따라와 보쇼 하면서 걸었겠어? 자네를 주시하고 있었던 자들만 자그마치 이십 명이 넘어. 그래도 그 와중에 눈치 채고 골목길로 들어서 준 것을 감사해야 하나?"

"그 자들이 누구요?"

"대충은 알겠고, 모르는 놈도 상당수 끼어 있더만. 하여간 자네는 골치 아픈 존재임에는 틀림없어."

하공량은 그의 말대로 그 동안 자신을 찾아내기 위하여 고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왜 나를 기다린거요?"

"노부가 알 것이라 생각하나? 알아도 말을 해줄 것이라 믿지 않겠지? 가 보면 알게야. 하여간 비원에서는 자네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더군. 개방까지 자네를 찾으러 다니고 있어. 은밀하기는 하지만 백련교 같은데 그들도 자네를 찾고 있지."

하공량의 말은 전 중원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가 골치 아픈 존재라는 하공량의 말은 옳았다. 존재함으로 해서 신경을 쓰게 만드는 존재. 아예 모른 척 무시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존재.

"상화(相和) 낭자는 어서 그의 모습을 바꾸어주시게. 다른 마차로 갈아타야 될 것 같아."

"알겠어요."

그녀는 담천의를 보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가지가 있었고, 그 옆의 상자를 열자 인피면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처음이라 불편하시겠지만 잠시만 참아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내가 꼭 이래야 할 필요가 있소?"

담천의가 거부하려 하자 밖에서 다시 하공량의 말이 들렸다.

"그들에게 발각될 것이라면 왜 승복은 걸쳤나? 우리 역시 자네 때문에 다른 사람 미움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 우리는 자네를 도우려는 것뿐이야. 싫으면 언제고 자네 마음대로 바꾸면 되는 거네."

그 말에 담천의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천지회의 유곡이란 자를 만나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상화라 불리는 여인이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그리고 성숙한 여인의 육향이 풍겨 나왔다.
(제51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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