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31회

등록 2005.07.28 07:45수정 2005.07.2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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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또 한번 큰 실수를 했군.”

아마 영목은 우교의 말을 십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단순히 일에 대한 질책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영목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문주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지 몰랐다.


“............!”

그는 우교의 질책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처벌을 내린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황임의 거처에 드나든 자는.....?”

“시비 두 명, 돌아 온 곽흔(郭痕)과 잠형각(潛形閣)의 각주(閣主) 잠백(暫魄)뿐이었습니다.”

영목은 그제야 대답을 했다. 곽흔은 사흘 전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문주를 만나보고는 어제 황임을 보러간다고 했을 뿐이었다. 문주는 기이하게도 아무도 황임의 거처에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곽흔이 황임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황임의 사인은?”

“잠백의 말로는 세 개의 비침(飛針)이 뇌호혈 등 세 개 대혈에 박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비침은 잠백의 특기지?”

잠형각은 일종의 형무(刑務)를 담당하는 곳이다. 문파 내의 처벌이나 배신자에 대한 처단 등이 주임무로 그곳의 각주인 잠백은 영목과 절친한 사이. 영목과 잠백은 같은 시기에 살천문에 입문했고, 그 인연으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잠백이 황임을 조사한 것은 문주의 명에 의해서였다. 황임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했고, 열흘을 하루 앞둔 어제 저녁 갑자기 죽었던 것이다. 이미 늑대의 이빨이라는 금랑혈(金狼血)이 박힌 황임은 운신할 수 없는 상태여서 이곳 누구라도 손쉽게 그를 죽일 수 있었다.

“..........”

영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문주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우교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왼손을 내저었다.

“나가 보게.”

무슨 뜻일까? 영목의 죽음에도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냥 나가보라는 것은 문주가 어떠한 복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까? 영목은 공손하게 절을 올린 뒤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우교의 좁혀진 검미는 아직도 펴지지 않고 있었다.

(네놈은 끝까지 나를 배신하는구나.)

영목이 문을 열고 나가자 그제서야 우교는 걸어가는 영목의 등을 바라보았다. 약간 구부정한 등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우교의 거처를 빠져 나온 영목은 한참을 걸은 후에야 비로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교는 기이하게도 마주 선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묘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거대한 산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

“자네 얼굴이 왜 그리 어두운가?”

영목이 우교가 머무는 전각을 완전히 벗어나 열락장(悅樂莊)의 후원으로 들어설 때 들린 목소리였다. 영목은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좌측을 바라보았다. 말을 건 사람은 잠백이었다. 양 귀밑머리부터 하얀 머리칼이 타고 오르는 중년의 잠백은 매우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살수답지 않은 맑은 눈과 흰 피부는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게 했다. 영목은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곧 허허로운 미소를 띠웠다.

“마음이 좀 심란하네.”

잠백은 살천문 내에서도 전설이었다. 이십년간 그는 아흔 두 번의 살행을 완벽하게 해낸 인물이었다. 영목이 폭 넓은 판단력과 세심함으로 살천문의 총타수로 발탁되었던 것에 비해 잠백은 완벽한 살수로서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문주의 거처를 다녀오는 길인가?”

잠백이 영목 가까이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네.”

“황부문주의 죽음에 대해서 추궁을 받았겠군.”

영목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를 의심하더군.”

“나를...?”

잠백이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래도 부문주의 거처를 다섯 번이나 들락거린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가? 부문주 거처에 들락거린 사람은 나만이 아니지 않은가?”

“곽흔은 단지 한번 다녀갔을 뿐이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다섯 번의 조사에서 뭔가 더 알아낸 것이 있는가? 왜 부문주가 그런 짓을 했는지 말이야.”

영목의 물음에 잠백은 주위를 습관처럼 둘러보았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다는 모습이라서 영목은 호기심이 일었다. 잠백이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며 영목의 귀에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내 거처로 가서 술 한 잔 하지 않으려나?”

뭔가 중요한 말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영목 역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떡였다.

“좋네.”

그 순간이었다. 영목은 자신의 허리가 뜨끔해지며 온 몸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자 잠백이 그를 부축했다.

“자...자네...?”

영목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치켜뜨자 잠백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황임의 거처를 제일 많이 다녀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네였다네. 내가 조사한 내용을 가장 먼저 알고자 했던 사람도 문주가 아니라 자네였고....”

어느 틈엔가 그 두 사람의 곁으로 세 명의 인물이 다가서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영목은 완벽한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다. 그들은 잠백이 이끄는 잠형각(潛形閣)의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고 있었던 냉혹함이 떠올라 있었다.

“총타수께서 너무 피곤하신 모양이다. 잠형각으로 모셔 편히 쉬시게 하거라.”

세 인물은 대답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대답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대답하는 것보다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목의 얼굴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잠백은 절친한 친구였지만 그는 인정보다 문파의 일을 우선하는 인물이었다.

영목은 잠시지만 자신의 자만심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잠백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 대신 빙그레 웃는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 말이 많았다. 더구나 과장스런 몸짓까지 했다. 그것은 경고였지만 영목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자신에게 잠백이 달라진 태도를 보인 것은 친구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몰랐다. 빨리 눈치 채고 도망가라는 위험 신호인지도 모르고 대화를 계속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했다.

(문주는 이미 알고 있었군.)

영목이 언뜻 정신을 잃기 전 바라보았던 잠백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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