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32회

등록 2005.07.29 08:25수정 2005.07.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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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의외로군. 언제부터 자네가 균대위에 몸담고 있었나?"

손불이는 탁자 위에 놓여진 초혼령을 보며 탄식어린 말을 뱉어 냈다.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고 소문이 난 손불이라도 초혼령이 탁자 위에 놓여진 순간에는 전율과 함께 당혹감을 숨기기 어려웠다.


"불행하게도 나는 균대위에 몸담고 있지 않네."

갈유는 친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죽음의 대명사로 알려진 초혼령을 전해주는 일은 할 짓이 아니었다. 갑자기 손불이가 목이 막히는 듯 헛기침을 했다.

"흠흠… 초혼령이 이렇게 전달된 적이 있었던가?"

혼잣말이었다. 초혼령은 항상 누가 가져온 줄 모르고 그 대상에 정확히 전달되었다. 자고 일어나다 침상 베개 옆에서 발견된 적도 있었고, 아내의 소매에 달려있는 경우도 있었다. 양만화에게 떨어진 것처럼 음식 속에 담겨져 있다가 발견되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

"삼일 후엔 천고문이 걸리겠군. 빌어먹을… 그들은 세상에 내 죄를 얼마나 까발릴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손불이라 해서 죄가 없을리 없다. 장사꾼이라면 폭리를 취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의 집안이 몰락했을 수도 있고, 종래에는 누군가가 자살했을 수도 있었다. 손불이가 알든 모르든 간에 말이다.

손불이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속이 타는 것이다. 아무리 해금되었다 하나 초혼령의 존재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포감을 준다. 그 공포를 손불이도 비껴갈 수 없는 것이다.


"규칙이 바뀌었네. 자유롭게 변해 어떻게 행사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네. 삼일 후에 천고문이 걸리지 않을 수 있고, 초혼령이 전달된 후 십일 만에 온다는 규칙도 사라졌네. 오늘 밤일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네."

손불이는 수심에 찬 갈유를 재차 바라보았다. 친구의 마음을 모를 바 아니었다. 어떤 연유에서 저 초혼령을 자신에게 전달했는지는 모르지만 친구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터였다.

"내 목숨을 구걸했나?"

갈유는 애꿎은 술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손불이의 눈을 직시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다. 친구를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약조를 받아 내지는 못했네."

손불이는 갈유의 안타까운 시선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력감과 자괴감이 그의 전신에 퍼지며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허공에 둔 채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처음.... 서른여덟에 천지회의 회주가 되고 나서, 나는 바로 이것이 언제 나에게 떨어질까 전전긍긍했다네. 무척 겁이 났지. 악몽에 시달리다가 벌떡 일어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렇게 몇 년을 무사히 지내다보니 그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더군."

손불이는 초혼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초혼령이 손불이에게 떨어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는 천지회의 세 회주 중 하나였고, 유곡이 사라진 지금 담천의가 찾아야 할 대상이 분명했다.

"그리고 균대위가 사라지자 나는 초혼령의 악몽을 잊을 수 있었다네. 헌데 지금에 와서 이것이 나에게 떨어지다니 세상일이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군."

"어찌할 셈인가?"

갈유의 물음에 손불이는 여전히 텅 빈 동공을 허공에 두며 말을 이었다.

"어떠한 조직이던 조직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네. 누군가가 그 조직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없다고 해서 유지하지 못할 조직이라면 이미 그 조직은 조직으로서 가치가 없네."

사람은 왕왕 착각 속에 살아간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특히 그런 오해를 하기 쉽다. 자신이 없으면 마치 그 조직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착각 말이다. 하지만 조직이란 것은 매우 묘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사라져도 조직은 멀쩡하게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다. 단지 어떠한 일을 처리하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하거나, 일시나마 비효율적으로 변화하는데 그칠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천지회가 사라지지 않네. 천지회는 짧은 기간 동안 완벽하게 기반을 구축했네. 이제는 어떠한 핍박이나 어려움이 닥쳐도 천지회는 존재할 것이란 말일세. 황제가 바뀌어도, 나라가 바뀌어도 천지회는 영원히 남게 될 것이네. 유곡의 머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네."

손불이는 말을 하며 언뜻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만한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유곡이 행방불명되었네."

"우려했던 일이지. 그는 얼마 전 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천지회의 분열을 바라지 않아 그 일을 덮었다네. 나이가 들면서 용기가 사라진 탓이기도 하지."

"천지회의 십이장로 중 하나로 밝혀진 이혼권 언무탁도 죽었네."

이어지는 갈유의 말에 손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 아픈 일이네."

"그는 몹쓸 짓을 했더군. 왜 그런 짓을 해야 했을까?"

"본 회는 너무나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 일일이 통제할 수 없네. 그것 역시 내부의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벌린 일이겠지."

손불이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지회의 내부 일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알려줄 수는 없다. 그는 탄식을 흘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본 회는 이제 힘이 있네. 단순히 무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이 중원은 이제 천지회의 의도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숙주(宿主)에 기생하는 존재는 절대 아니네. 본 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세 명의 회주가 사라진다 해도 끈질긴 자생력으로 금방 회복할 수 있지."

"이제 그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네. 천지회는 앞으로도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걸세. 언제나 전면에 나선 자의 뒤에 서서 그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일이지."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천지회는 힘이 있다고 말했지만 상대는 공포의 초혼령이었다. 한번도 그 신화가 깨진 적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맞설 텐가?"

갈유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과는 달리 손불이는 자신감을 비치고 있었다. 우려가 되었다. 친구가 맞서겠다면 자신은 목숨을 걸고 친구를 도와야 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 해도 도와야 하는 것이 친구였다.

"자네는 내가 맞서길 바라는 겐가?"

"나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무사할 수 있다면 어떠한 결정이던 따를 마음이 있네."

그것은 갈유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손불이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맞선다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갔지만 그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네."

"그럼 초혼령의 처분에 자네의 목숨을 맡기겠다는 말인가?"

"아직까지 나는 결정하지 못하고 있네."

손불이는 담담한 미소를 베어 물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온 손불이였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언제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극복했다.

"자네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에 직면했군."

"알고 있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술잔을 들어 비웠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 준다. 두 사람 역시 인간이었고, 막연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손불이가 툴툴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장사꾼이네. 나는 이번에 큰 손실을 입을지 모르지만 최선의 방책을 생각할 것이네."

손불이는 철저한 상인이었다.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손해를 봐야 하는 거래라면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손해로 거래를 할까 하는 사람이 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담보해 거래에 응할 만큼 철저한 상인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놓고 있었다. 최소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 속에는 자신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58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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