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보고 싶어 죽겠어요!"

한때 자퇴원을 냈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온 제자에게 전화 오던 날

등록 2005.09.11 20:23수정 2005.09.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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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이 하나라도 열렸을까 싶어 밭에 나간 길이었다. 장맛비 탓인지 여름 내내 잎만 무성하고 꽃이 피었다 진 흔적이 있을 뿐, 막대기로 호박 줄기를 아무리 들쳐 대도 시원스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줄기를 다치면 큰일이다 싶어 마음을 접고 약이 오른 풋고추만 두어 주먹 따서 검정 비닐에 담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받아보니 이태 전에 담임을 맡았던 제자 아이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선생님, 보고 싶어 죽겠어요.”

보고 싶다는, 아니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속으로는 그 말만을 몇 번이고 곱씹고 있었다. 그때 이 아이도 그랬을까? 학교에 자퇴원을 내고 처리만을 며칠 남겨놓은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보고 싶다고, 보고 싶어 죽겠다고. 너와 이어졌던 끈을 끊어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롭다고. 널 포기할 수 없다고. 마치 깜깜한 절벽 앞에서 절대자에게 드리는 기도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쏟아놓은 말에 다행히도 아이는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었다. 이태가 지나 부메랑처럼 돌아온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 속의 밝은 목소리가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엄마하고 함께 저녁 먹고 있어요. 오늘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에서 월급 탔거든요. 선생님 보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가 전화 하라고 하셨어요.”

잠시 후, 나는 그의 모친과 전화통화를 했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이면 못해도 서너 차례 전화 상담을 했던 것이다. 아이가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어엿한 대학생이 된 데는 애를 태우면서도 딸을 이해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모친의 공이 컸다. 그 무렵, 담임과 학부모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도 했다.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저야 부모니까 힘들어도 당연하지만 선생님이 너무 고생하시네요.”
“교사가 제자들 때문에 힘들고 고생하는 것도 당연한 거지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보낸 세월이 꼬박 일년이었다. 아이는 무사히 진급을 하여 졸업반이 되었고, 가끔 나를 찾아와 귀엽고 사랑스런 눈을 깜박이다가 가곤 했다. 나는 더 없이 행복하고 교사로서 보람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방황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만큼 변해버린 아이에 대하여 나는 차츰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저 아이를 변하게 한 것은 새 담임의 엄격한 지도방법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하루는 나를 찾아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때문에 저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아시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3학년 때는 잘하라고요. 그래서 힘든 것 참고 잘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2학년 때 못하고 지금 잘한다고 섭섭해 하시면 안 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면서 마음에 확신이 서는 것이 있었다.

‘그래, 저것은 분명 사랑이 한 일이야. 내가 준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아니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을 거야.’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무심코 밭두렁 쪽으로 돌아간 눈길에 뭔가 걸려든 것이 있었다. 너른 호박 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던 호박이었다. 애호박으로서는 시기를 놓쳤지만 가을걷이를 할 무렵에는 넉넉하고 푸짐한 늙은 호박이 되어 밭두렁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머리에서 그 광경이 그려지자 문득 몇 해 전에 쓴 시가 한 편 떠올랐다.

애호박을 따기 위해서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딱 고만할 때 따야
식구들 아침 밥상에 오를 수 있다.

아차, 때를 놓친 호박들도
여름 한철이 지나면
아낙네 엉덩짝 마냥 둥글넓적해지고
안은 안대로 노랗게 익어
이웃집 밥상에까지 오르게 된다.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
무성하던 것들이 다 스러지고
밭두렁에 뎅그러니 남아 있는 것은
거지반 때를 놓쳤거나
오랜 기다림을 견딜 것들이다.

호박을 따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고만한 때를 잘 맞추기 위해
호박잎 사이로 눈을 번득이다가
아차, 때를 놓쳐도
외려 더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다.

오래 묵은 호박일수록
그 맛이 더 멀리까지 간다.

-‘호박을 따다가’ 모두


다음 날, 나는 개학을 이틀 앞두고 학교에 갔다. 오랜만에 교실 문을 열자 화약 냄새 같기도 한 습하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마다 나는 이 냄새를 맡아 왔다. 책상에는 푸르스름한 먼지가 제법 두껍게 쌓여 있다. 먼지가 푸르스름한 것은 곰팡이 때문이다. 한 달 동안 비워놓은 습한 교실에 곰팡이가 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곰팡이의 존재를 모른다. 개학하기 하루나 이틀 전에 학교에 나가 미리 교실을 깨끗이 청소해 놓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교사의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해마다 반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교실을 청소하고 걸레로 책상과 걸상을 닦는 일이 내게는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청소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걸레질을 멈추고 책상의 주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1학기 때는 선생님하고 많이 친하지 않았지? 내가 잘못한 거야, 네가 잘못한 거야?”
“둘 다요. 선생님은 아니라고 해도 제 눈에는 선생님이 편애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 네 눈이 더 정확하겠지. 고치려고 노력할게.”
“저도 노력할게요.”

부족한 만큼 정말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사랑의 대가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딱 한 마디 아이들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긴 있다.

“선생님, 보고 싶어 죽겠어요!”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손질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조금 손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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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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