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68회

등록 2005.09.21 07:57수정 2005.09.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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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능풍은 중원 전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중원 전체에 기이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더구나 철혈보 내부에서도 과거와 같지 않게 매끄럽지가 못하고 자꾸 허점이 노출되고 있었다.

육능풍은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중원에는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아직 미진하지만 철혈보 내부의 문제는 어느 정도 그 원인이 은영전에 있음을 알았다. 특히 은영전주에게 문제가 있었다.


(여후량(呂厚亮)… 그토록 완벽하던 그에게 왜 자꾸 실수가 나오는 것인가?)

여후량(呂厚亮)은 그 존재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은영전주의 이름이다. 그가 앞에 있다면 따귀를 갈기면서라도 물어보고 싶은게 육능풍의 내심이었다.

"만약 말일세. 전적으로 만약이네. 누군가가 현재 엉켜있는 중원정세를 이용해 패권(覇權)을 움켜쥐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나?"

"서로 싸우게 해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독고상천의 대답이었다.

"지금 우리가 저들을 쫓아 죽이는 것처럼?"


육능풍의 말에 독고상천과 초산은 무언가 퍼뜩 깨달은 듯 동시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두 사람의 가슴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육능풍이 근심했던 일이 무언지 알게 된 것이다. 육능풍의 시선이 다시 사당 쪽으로 향했다.

"본 보의 규칙은 철저하게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니 저들은 반드시 죽어야 하지. 하지만 저들을 죽이기 전에 더 중요한 일이 무어라 생각하나?"

"그들이 나온 비밀 통로가 어딘지… 섭장천이 왜 일행에서 빠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정보를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초산의 대답이었다.

"그렇지. 거기에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무슨 말씀이온지?"

되묻는 초산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육능풍은 단순하게 답을 주는 분이 아니다. 좀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 하지만 초산의 예상과는 달리 육능풍의 입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이 나왔다.

"저들에게 그 정보를 얻든, 못 얻든지 간에 여전주(呂殿主)에게 천마곡의 비밀 통로의 위치를 확인했다고 보고를 올리게. 그리고 우리는 그쪽으로 간다고 말이야."

"그… 그건…."

허위보고다. 알아낸다면 다행이지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고의로 허위보고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허나 초산은 말을 끊고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육능풍이 허위보고라도 하라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육노조는… 전주를 의심하고 있다!)

초산은 잠시 머리가 둔기에 맞은 듯 멍해왔다.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자신은 은영전 소속이고 은영전주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육능풍의 명이라면 다르다. 망설이는 초산의 귀로 육능풍의 굵직한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뒷 책임은 모두 노부가 질 것이야."

육능풍의 입에서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초산은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알겠습니다. 노조(老祖)."

고개를 숙이는 초산을 뒤로 하고 육능풍은 아직도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섭장천이 빠졌어… 왜…?"

사실 섭장천이 일행에서 빠졌다는 사실은 그들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섭장천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빠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연과도 같은 그 사실 때문에 육능풍은 또 하나의 가정과 추론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했던가? 대사(大事)를 성취하는 일은 인간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천하를 움켜쥐는 일이라면 더욱 더.

--------------
항주(杭州)는 색향(色鄕)이다. 하루 밤에 천 냥짜리 계집이 있는가 하면 한 냥짜리 계집도 있는 곳이 항주다. 그래도 항주만의 멋은 물 위에 화선(花船)을 띠워 은밀한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어둠이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물 위엔 꽤 많은 화선이 떠 있었다. 붉은 등이 켜져 있는 화선에서는 계집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물 위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돈만 있다면 정말 좋은 곳이군."

노점과 같이 한 쪽이 툭 터진 조그만 반점 앞에서 국수를 먹고 있던 조국명이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항주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내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국수를 천천히 먹으며 말했다.

"자네 말은 마치 하룻밤 풍류라도 즐기고 싶다는 의미로 들리는군."

사내의 말에 조국명은 속내를 들킨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풍류라면 이 세상에 철골호한의 양의검(兩儀劍)을 따라갈 사람이 있을까?"

그 말에 사내는 마지막 국수 가락을 입에 넣더니 입술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신검산장의 장주인 풍철영의 동생 양의검(兩儀劍) 풍철한(馮澈漢)이었다. 얼굴은 아직 창백해 오랫동안 병을 앓은 모습이었지만 그의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는 맑은 정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 비싸지는 않다네."

풍철한은 농을 던지면서도 조국명을 이해했다. 자신과는 달리 조국명은 산서성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신검산장의 대소사를 맡아 이십여 년을 넘게 갇혀 있다시피 살았으니 이렇듯 강남의 휘황한 절경이 낯 설을 만도 하였다. 조국명은 풍철한이 짓궂게 파고들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먹이를 먼저 채 간 놈들 때문에 허무하긴 하군. 헌데 왜 손을 쓰다가 불쑥 돌아간 것일까?"

조국명으로서는 그럴 만도 하였다. 충분한 숙의 끝에 이대(二隊)를 이끌고 어제 저녁 항주에 도착해 보니 열락장이 아예 문을 닫은 뒤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 역시 이미 자세하게 보고를 받은 터. 그 때였다. 풍철한이 무어라 대꾸하려 할 때 반점 쪽으로 급히 다가 온 회색의 무복을 걸친 인물이 그들 자리를 지나치면서 냉소를 터트렸다.

"흐흣… 천하의 풍철한이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몰골조차 말이 아니군."

풍철한이 검미를 치켜 올리며 냉소를 터트린 무복 차림의 사내를 훑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마 풍철한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풍철한은 주먹이 나가지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누군가 알고 나서 싱긋 웃었을 뿐이었다.

무복의 사내 역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의 자리를 지나쳐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풍철한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의 태도만으로 본다면 풍철한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는 자인가?"

보다 못한 조국명이 불쑥 물었다. 양의검 풍철한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과거 혼자 몸과는 달리 균대위의 대주 중 한 명의 신분으로 이곳에 왔다지만 너무 참는 듯 했다.

"글쎄…? 안다면 안다고 해야겠지. 구년(九年) 전인가 서호(西湖) 근처에서 패악을 떨던 놈 하나를 손봐주었지. 헌데 이 놈이 앙심을 품고 밤중에 패거리를 끌고 비겁하게 암습을 하더군. 적당히 다리를 분질러 놓고 돌려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죽은 모양이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당연히 앞좌석에 앉아 있는 무복의 사내에게도 들린 터.

"사내대장부란 작자가 사람을 죽여 놓고 비겁하게 끝까지 발뺌을 하는군. 형의 복부를 관통한 검이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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