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69회

등록 2005.09.22 07:54수정 2005.09.2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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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전신에서 미세한 살기가 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풍철한은 그 사내에게 대꾸하지 않고 조국명을 보고 물었다.

"그 자식 동생인 모양인데 그 뒤 두세 번인가 달려들기에 점잖게 타일러 준 적이 있다네. 꽤 오랜 전의 일이라 잊어버렸는데 또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하는 풍철한은 내심 긴장되기는 하였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다가 회의무복의 사내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저 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칠년 전이었던가? 괄목상대라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과거의 저 자는 풍철한에게 상대가 되지 않던 자였다. 헌데 칠년 만에 나타난 저 자는 마치 그동안 날을 세운 듯 예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정상적인 몸이었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정도로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칠년 만에 저렇듯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싸움을 피할 풍철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일이라도 피해야 할 시기였다. 처음으로 균대위의 개양대(開陽隊) 대주로서 처음 초혼령주를 보러 온 길이다. 이런 시기에 사소한 다툼이라도 해서 그 소문이 나면 균대위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참고 있는 것이다.

사내 역시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을 듯 보였다. 그는 국수를 주문해 놓고는 여전히 풍철한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무림에서 양의검 풍철한을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가려나?"


조국명이 말하자 풍철한이 고개를 끄떡였다.

"영 성가시군."


말과 함께 풍철한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급히 풍철한을 향해 뛰어 온 이십대 후반의 사내가 넙죽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풍대협. 오랜만입니다."

아주 반가운 목소리였다. 이목구비가 둥글둥글한 얼굴에 인심이 후하고 넉넉할 것 같은 인물이었는데, 입고 있는 의복이나 장식으로 보아 제법 글깨나 읽고 꽤 넉넉한 생활을 하는 인물로 보였다. 풍철한은 중년인이 고개를 들자 얼굴을 바라보며 상대가 누군지 기억하려는 듯 보였다. 몇 번 본 것 같기는 한데 금방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풍대협께서 항주에 오셨으면 반드시 들러 주셔야 하는…."

그러자 풍철한이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중년인의 말을 끊었다.

"아… 운씨세가(雲氏世家)의 신형(申兄)이셨구려. 오랜 만에 강남땅을 밟았더니 기억력이 흐려져서… 못 알아봐서 미안하오."

풍철한의 태도에서는 은근히 범인(凡人)이 따라올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위축되게 만드는 묘한 것이어서 배우려 한다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었다.

"풍대협께서 소생을 기억해 주시다니 백골난망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풍대협과 비슷한 분을 뵈었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운대공자(雲大公子)께서 빨리 찾아보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바람에…."

"규룡(揆龍) 말이오?"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 친구는 북경으로 간지 오년이 넘지 않았소?"

"낙향하신지 사개월 되었습니다."

"관직에서 떠난 것이오?"

"그런 말씀은 공자님과 천천히 나누시기로 하고 일단 가시지요."

풍철한은 잠시 주저하면서 조국명을 바라보았다.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다. 항주의 운가(雲家)는 신안상인(新安商人) 중에서도 그 뿌리가 깊은 대부호의 가문이다. 사대(四代)에 걸쳐 부를 유지하고 있는, 강남에서 뿐 아니라 중원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전통 있는 상가(商家)이자 토호다.

과거 주원장을 도와 명을 건국하는데 일조를 했던 터라 명 건국 이후 운씨세가의 부(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운규룡(雲揆龍)은 운씨세가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가 될 인물. 풍철한과는 우연한 기회에 서로 의기투합하여 호형호제하게 된 사이다.

"아직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네."

조국명이 망설이는 풍철한을 보며 말했다. 이왕 균대위에 합류할 것이라면 일찍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영주(領主)가 말한 기한보다 하루 반나절 정도 일찍 도착한 것이다. 풍철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자네는 오늘 밤 항주의 풍류를 즐기게 될지 모르겠군."

"쓸데없는 말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조국명에게 다시 한번 씨익 웃어주더니 풍철한이 중년인에게 말했다.

"가 봅시다. 그 친구는 어디에 있소?"

말과 함께 세 사람은 반점을 나섰다. 신씨라 불린 청년은 풍철한의 마음이 바뀔까 염려스러웠던지 바삐 앞장서서 걸으며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별화선(鱉花船)에 계십니다. 요사이 그 분의 낙이지요."

청년이 가리키는 배는 멀리 떠 보이는 화선들 중에서 특히 크고 화려한 화선이었다. 배의 후미에는 꿩의 꼬리 부분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언뜻 보기에 꿩의 모양 같았다. 그들이 나가자 회의무복의 사내는 시킨 국수를 먹다말고 입가에 미소를 띠우더니 조용히 반점을 벗어났다.

-------------
"억---!"

비명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 비명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흑마조(黑魔爪) 형가위(邢苛尉)의 가슴팍이 갈라지며 이승에서 마지막 남긴 소리였다. 반당의 도(刀)는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보였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수였다. 형가위가 상대하기에는 반당은 너무 벅찬 상대였다.

동시에 만향지(滿香指) 진독수(秦獨秀)의 다섯 손가락에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만개한 화영(花影)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의 움직임은 매우 부드러웠는데 그와 맞서는 오독공자 남화우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떠올랐다. 오독신공(五毒神功)을 극성까지 끌어올렸고, 간간히 절정에 달한 용독술로 상대를 공격해도 진독수의 공격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남화우는 주위에 마치 봄날 화창한 꽃들이 피어난 듯 계화(桂花)의 향기가 코로 스며들고 지친 몸으로 손에 든 독분(毒粉)을 뿌리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옴을 느꼈다. 동시에 전신 여러 군데에 통증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진독수는 그것도 모자라 정신을 잃은 남화우의 아혈 및 수혈을 재차 짚고는 한쪽에 기대어 놓았다.

이제 남은 인물은 오직 한 명, 육능풍과 손속을 겨루고 있는 금존불 뿐이었다. 금존불의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자신들 일행이 무사히 탈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단 반 시진 만에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반당을 상대하던 청마수가 일다향이 지나가도 전에 죽고, 흑마조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가 조금 전 죽은 것이다. 게다가 오히려 죽는 것이 편하다는 듯 필사적인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달려들던 정운학이 독고상천과 초산의 합공에 의해 제압되자 이미 끝난 일이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중원에서 찬란한 위명을 날리고 있는 육능풍과의 일전만이라도 떳떳하게 겨루는 일이었다. 다행히 철혈보의 다른 인물들은 많았지만 육능풍과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반 시진 이상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금존불은 더 이상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승부를 보아야 했다.

"아미타불…!"

금존불의 입에서 노기어린 불호성이 터져 나오며 합장하고 있었던 쌍수를 앞으로 쭉 뻗었다. 보통 때보다 손바닥이 두세 배나 커진 듯한 금존불의 쌍수에서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휘황한 금광(金光)이 해일처럼 일어나며 뇌성이 치는 듯한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우르르릉----- 콰아---

서장(西藏)의 비전무공인 대수인(大手印)과 흡사한 그것은 뇌음사의 비전인 뇌음장(雷音掌)이었는데, 금존불의 본신진기인 금단신공(金丹神功)과 더불어 본래의 위력보다 훨씬 파괴적이고 강렬해 보였다. 더구나 이미 끝장을 보겠다는 듯 움직임이 거의 없던 금존불의 두 발이 지면을 빠르게 박차며 육능풍에게로 쏘아가자 육능풍의 얼굴에서도 긴장감이 떠올랐다.

금존불이 자신에게 쏘아오는 것은 근접전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병기를 사용하는 자에게 있어, 특히 일월신륜(日月神輪)과 같이 날리는 병기를 사용하는 육능풍에게는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오히려 불리했다.

(이제 승부를 보겠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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