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놈에게 '땅'은 목숨이었다.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 - 1편

등록 2005.09.23 16:28수정 2005.09.2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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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시기에 자신의 ‘땅’을 갖기 위해서는 국왕의 친(외)척이 되거나,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거나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아랫것들 동원해 갯벌을 막거나, 개간할 수 있지만, 이것도 저것도 없는 것들은 직접 밀려오는 바닷물을 육신으로 막고, 산비탈 목숨처럼 질긴 나무 끌텅을 파내야 했다. 손바닥 지문이 없어지고 손톱이 몇 번 빠져야 겨우 몇 알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하의도의 문전옥답들은 4-5백 년 전 대부분 그렇게 선조들이 마련한 땅이었다.


고려가 운명을 다한 이유 중에 하나가 무신의 난 이후 권문세족들의 농장확대와 사원전의 확대 등으로 나라의 곳간은 거덜나고 농민들은 파탄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도한 것도 고려 패망의 원인이었던 권문세족들의 토지대장을 불사르고, 신흥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권력을 잡으려면 ‘땅’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하의3도 농민들의 땅을 찾기 위한 400여 년의 대장정은 권력을 잡기 위함도 아니었다. 다만 ‘땅’이 섬놈의 목숨이었기 때문이었다.

a 하의도의 대부분 농지는 갯벌을 막아 일군 갯땅이다. 전라도에 많은 땅들은 갯벌을 막아 일구어서 전라도 사람들을 '갯땅쇠'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의도의 대부분 농지는 갯벌을 막아 일군 갯땅이다. 전라도에 많은 땅들은 갯벌을 막아 일구어서 전라도 사람들을 '갯땅쇠'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 김준

하의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농민항쟁과 관련된 ‘하의3도’는 하의도와 신의면에 속하는 상태도와 하태도를 말한다. 이들 지역은 신안군에서도 가장 남단에 위치하며 진도의 가사도와 조도군도와 함께 먼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편 지금은 금호방조제와 영암방조제로 바닷길이 막힌 해남 화원반도와 하의3도 그리고 장산도와 목포로 둘러싸인 이곳 바다를 ‘시아바다’라고 부르는데 조류소통이 원활하면서 바다가 잔잔해 일찍부터 꼽히는 어장이었으며, 지금 인근 섬사람들은 양식장에 기대어 살고 있지만 하의도 사람들은 웬수같은 ‘땅’을 파고 살고 있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하의도에는 청동기문화인들이 유입되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선조 즉 입도조(최초로 섬에 들어온 조상)들은 임란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말 선초에 왜구의 출몰로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해안지역이 안정된 후에 이주가 시작될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진도처럼 큰 섬도 세종 15년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겨우 113호 정도가 살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주민들의 직계혈족들의 입도조는 임란이후 대부분 정착한 것으로 밝혀져진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주민들은 대부분 인접한 해남에서 가장 많이 옮겨왔으며 영암, 진도 혹은 같은 섬에도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1759년 〈여지도서〉에 의하면 하의도에 총 60호, 160명(남 79, 여 81)이 거주하였으며, 30년 후〈호구총서〉에는 하의도 143호, 540명(남 277, 여 263), 상태도 80호, 311명(남 193, 여 118), 하태도 73호, 203명(남 112, 여 91)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군수 오횡목이 기록한 〈지도군총쇄록〉에는 1896년 하의도의 총 호수는 413호로 나타나 있다. 2004년 하의도 본도가 793호 인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적지 않는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a 홍씨가가 소작료를 받아 갔을 논에는 나락이 익어가고, 옆에는 농민항쟁의 기념관이 있다(하의면 대리)

홍씨가가 소작료를 받아 갔을 논에는 나락이 익어가고, 옆에는 농민항쟁의 기념관이 있다(하의면 대리) ⓒ 김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땅 : 권문세도 홍씨가와 싸움


하의3도의 ‘땅’과 관련된 최초 기록은 〈비변사등록〉(제 152책, 영조 44년 10월 초7일)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에는 ‘하의도와 상태도는 모두 정명공주방에서 절수한 땅이다. 당초 사여(賜與)는 20결에 불과했고, 그 뒤 도민이 사비와 물력으로 제방을 쌓아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실록〉(영조 6년 12월 29일)에도 ‘정명공주방의 면세전 20결이 섬 속에 있었다가 그 뒤에 공주의 외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선조 때 전체의 섬을 절수했다고 핑계를 대고는 민전 160결에 대해 몽땅 수세하니, 백성들이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계묘년(1723) 무렵에 한성부에 송사를 냈으나 결국 졌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선조의 딸 정명공주는 하의3도의 땅 20결을 면세전으로 하사받은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섬 주민들이 ‘사비’와 ‘물력’으로 제방을 쌓아 만든 ‘땅’마저 절수지로 둔갑시킨 점이다. 즉 하의 3도 전체를 절수 받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갯벌을 막고 개답을 한 모든 토지는 절수지가 된다는 논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고 있는 절수지(折受地)란 무엇인가.

신라시대부터 관리들에게는 등급에 따라 신분 유지를 위한 노비와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를 녹읍이나 녹봉, 전시와 직전, 과전 등으로 불렀다. 조선초기에 왕자와 공주들에게 직전이 지급되었는데 선조대에 이르러 직전제는 유명무실해졌고, 임란 이후에는 가혹한 세금과 잡역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떠나면서 주인이 없는 땅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국가가 재정 곤란이 발생하자 왕실과 왕족 혹은 왕비족의 경비와 의례비용을 관리하는 궁방에 황무지 등 미개간지를 나누어주고(이를 절급이라 함), 세금을 걷어 사용하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절수’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안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초들이 이미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민전(民田)을 절수지로 전환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결혼한 ‘홍씨가’는 정명공주방의 절수지 20결 외에 하의3도 주민들이 일군 민전 120여 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며 농민들에게 조세를 징수하면서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이 피와 땀으로 만든 땅을 빼앗기는 것도 서러운데, 이미 농민들은 호조에 20결 외에 조세를 납부하고 있었던 토지에 다시 홍씨가가 소작료를 요구해 이중 조세를 부담하게 되었다는 점에 더욱 분노했던 것이다. 즉 하나의 토지에 호조와 권문세도가 양쪽에 세금을 내는 일토양세가 되었던 것이다.

a 주민들이 직접 제방을 막고 저수지를 축조했다. 오림리의 저수지 축조공사 완공후 기념사진(일제강점기)

주민들이 직접 제방을 막고 저수지를 축조했다. 오림리의 저수지 축조공사 완공후 기념사진(일제강점기) ⓒ 김준

하의3도의 주민들의 땅을 털도 뽑지 않고 가로채려 했던 권문세도가는 숙종에서 영조, 정조대에 걸치는 시기에 가장 위세를 떨친 풍산 홍씨가였다. 그 주인공은 정명공주의 남편 풍산 홍씨 12손 홍주원(洪柱元, 1606-1672)으로 대사헌 홍신상(洪履祥)의 손자, 예조참판 홍영(洪靈)의 아들로 태어나 1623년 선조의 딸 정명공주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13세 홍만용은 대사헌, 15세 홍석보는 이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1718), 16세손 홍상한은 영의정, 17세손 홍낙성도 영의정을 지냈던 집안이었다. 그리고 영조의 사위이며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즉 사도세자의 장인도 홍씨 집안이었다. 이후 홍씨 집안은 벼슬 내력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문제의 땅이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가지 직전에 소유주 ‘홍우록’(1883-1938)은 1906년 육군기병참위를 지내기도 했다.

홍주원이 정명공주와 결혼하면서 정명공주방은 영안위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조 4년(1728) 암행어사 박문수는 영안위궁의 절수가 8076결에 달하는데 이제 4대가 지났으므로 마땅히 국전에 의해 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홍씨가는 정명공주로 인해 하의3도 외에 많은 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절수 후 4대가 지나면 제비를 충당하기 위한 땅만을 면세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당시 세금을 면하는 땅(免稅田)은 ‘버려진 땅이나 황무지를 개간한 경우 일정기간 면세 혹은 감세’, ‘흉년으로 농사를 망치거나 휴경한 경우 면세’, ‘국가에서 수조권을 위임한 기관이나 개인 면세’ 뿐이었다. 〈비변사등록〉(152책, 영조 44년 무자년 10월 초7일)에 의하면 하의도민들은 홍씨가가 절수를 받은 20결의 궁전에 쌀 20두를 내고 있는데, 이제 홍씨가가 민전에도 이를 걷게 되면서 민전은 관에 내는 23두 외에 다시 40두를 더 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a 하의도는 원(제방)을 막아 바깥쪽은 염전을 만들고 안쪽에는 농사를 짓고 있다.

하의도는 원(제방)을 막아 바깥쪽은 염전을 만들고 안쪽에는 농사를 짓고 있다. ⓒ 김준

항의하는 농민 ‘삼수갑산’으로 보내고

그 동안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홍씨가는 인조 초년 24결을 절수 받은 이래 4개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도조를 징수하였고,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일반 민전에 대해서도 마치 절수 받은 것처럼 하여, 이후에는 하의도 전체 농지를 대상으로 도조를 거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주민들 경종 3년(1723)년 한성부에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패소하였고, 영조 6년(1730), 영조 44년(1768)에도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권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하의도농민조합에 참여했고, 농지탈환운동에 적극 참여한 김응재의 1946년 ‘하의3도 토지쟁의 실기’(예술문화, 제5호)에 전해오는 기록은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홍씨가가 가장 위세를 떨치던 영정조시대의 일이다. 정조대 하의도민들은 대표자 윤세민과 김호건 등 대표자를 뽑아 한양으로 상경케 했다. 촌놈들이 한양에 올라가 어쩔 줄 모르다가 북을 두드리니 왕이 불러 그 연유를 물었고, 이들은 진성서를 올렸다. 왕이 살펴보고 홍가는 나라를 속이고 도민을 착취한 죄 괘씸하니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고 도민에게 무명잡세를 혁파하겠다는 어제(御題)를 하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제를 품고 급히 도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내려오다 한강을 건너 영등포를 지난 도중에 괴한 5-6명에게 붙들려 어제와 제반 서류를 빼앗기고 홍가의 집에 붙잡혀 무고로 삼수갑산지방으로 정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실록이나 비변사등록에서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의도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이후 주민들은 홍씨가의 세도가 약화되기를 기다려 고종대에 대원권이 집권하면서 1870년 전라감사 이호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호준이 홍씨가의 사람들을 불러 국법위반을 꾸짖고 ‘24결 외 120여결에 대해서는 절대 세금을 걷지 못하도록 엄명하고, 24결에 대해서도 1결에 백미 20두씩만 부과하도록 하였다.

비로소 도민들은 일토양세의 부담을 벗게 되었고, 전라감사의 공덕을 기려 하의도 웅곡리와 상태도 서리 두 곳에 공덕비를 세웠다. 하지만 섬놈들이 땅을 갖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한제국기에 그 동안 하의3도민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덧붙이는 글 |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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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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