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 일본인 지주와 싸우다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 - 2편

등록 2005.09.23 17:09수정 2005.09.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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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전라감사 이호준의 판결은 도민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결정이었다. 이제 비로소 ‘땅’을 찾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서 도민들에게 다시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관리 이용익이 왕실재정의 확충을 위해 혈안이었는데, 특히 과거 궁방전, 목장토 등을 다시 조사하여 토지명부를 만들고 내장원에 부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1900년 하의3도 홍씨가의 소유로 인정되었던 24결과 하의도민의 땅으로 인정받은 나머지도 모두 내장원에 부속되었던 것이다. 그 후 홍씨가의 홍우록은 관찰사 이호준과 내장원경 이용익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땅을 찾기 위해 1908년 황실의 재산조사국에 반환을 청구했고, 조사국은 조사 후 내각(당시 내각총리대신은 이완용이었음)에 보고해 홍우록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하급증을 발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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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있던 하의도민들은 내장원에 속한 자신들의 땅을 돌려줄 것을 해당기관에 요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기대한 것과 달리 홍우록의 지시를 받은 목포에서 제일 난폭한 깡패와 일본인이 농민들을 매수하고 협박해 도조를 낼 것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이 경지는 우리에게 소유권이 있는 것이므로 일호라도 지불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 사건은 홍우록 측의 사주를 받은 당시 지도군수의 중재로 1년분 도조를 군수를 통해 홍씨가에게 납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도민들은 대표 3명을 뽑아 홍우록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1909)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경성지방법원 소송에서 패소하고 일본인 변호사 목미불지조(木尾佛之助)를 다시 선정하고 경성공소원에 공소심을 제기했다.

당시 도민들은 공소장에서 ‘하의도 땅은 선조대에 이미 151결여의 토지가 개간되어 소유권을 획득하였고, 그 결세를 호조에 내고 있었다. 정명공주방은 24결의 결제징수권만 하사받았는데, 정조대에 이르러 정명공주 자손이라 자가 나타나 하의도 전체를 사패 받았다며 결세를 홍씨가에 내라고 해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일토양세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홍우록측은 하의도 전답은 정명공주가 사패받은 땅, 즉 유토사패지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내장총리대신 이완용이 내린 하급증을 제시하였다. 재판부는 하의도민들이 제시한 60여 년 전 도민소유를 입증한 문서와 민유지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피공소인 홍우록은 전답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판결하고 도조를 징수하여 재산상에 손해를 입힌 것도 배상할 것을 판결하였다. 도민들은 이호준에 이어 일본인 변호사와 사무원의 공덕비를 하의도 대리 앞에 세웠다. 지금도 이들 공덕비는 대리의 하의3도농민항쟁기념관 옆에 세워져 있다.


a 경성공소원에 공소심을 제기해 승리하는 데 공덕을 기려 농민들이 세운 일본인 木尾佛之助의 공덕비가 기념관 옆에 세워져 있다.

경성공소원에 공소심을 제기해 승리하는 데 공덕을 기려 농민들이 세운 일본인 木尾佛之助의 공덕비가 기념관 옆에 세워져 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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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식민지권력과의 싸움

홍우록은 재판 사정이 어렵게 되기 시작하자 당시 한일은행장 조병택과 백인기에 헐값 1만5천원에 팔아넘겼다. 이후 이들은 목포의 정병조에게 5만7천원에 팔고, 정병조는 다시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權左衛門)에게 11만5천원에 팔아 싸움의 양상이 점점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인 우근은 오사카의 한 은행의 이사, 일본해상보험 사장 그리고 조선에는 해상운송 및 부동산관리를 목적으로 1909년 우근상사(주)를 설립한 인물로 1931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에 사무소를 두고 2,092정보의 논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근은 하의도의 땅을 관리하기 위해 1911년 경성 내산상화에 경영을 위탁하기도 했으며, 이 상회는 하의도에 출장소를 두고 일본인을 고용해 경영했다.


재판에서 하의도민들의 승소해 우근은 하의도에 투자한 것을 날릴 지경에 처하자 도민대표 중 박공진을 협박과 회유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거액을 주며 주민들에게 공소원 판결은 ‘부당이득반환에 불과한 것으로 소유권 확인을 위한 소송해야 한다’고 속이고 위임장을 받아 올 것을 지시하고, 더 나아가 경성공소원의 판결문을 빼앗아 올 것을 지시했다. 박씨는 고향인 상태도 친척들에게 겨우 위임장을 받았지만, 하의도에서는 강력한 항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토지소유권 확인 소송 위임장을 우근에 전달했다.

그리고 우근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분노한 하의도 대리 부녀자들이 배를 타고 상태도로 건너가 박공진을 비롯한 공모자들의 가옥을 파괴하였다. 이를 빌미로 목포경찰서에는 부녀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의도에 들어와 100여 명의 주민을 검속하였다. 이후 도민들은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 몰려가 항의를 계속하였다. 수백 명이 투옥된 가운데 도민들은 더 이상 시위를 지속하지 못하고 화해를 하게 된다.

당시 화해조건은 16개 조항으로 되었는데, 도민들은 우근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우근은 도민들에게 영구소작권을 주는 것이 핵심이었다. 우근은 도민들에게 영소작권 외에 위자료, 저수지, 도로, 선착장, 병원, 학교 개설, 영농자금을 저리로 대부 등을 약속했지만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여기에 우근의 주구 노릇을 한 박씨가에는 1,500두락의 소유권을 인정해주어 도민들의 불만을 샀던 것이다.

마침내 도민들은 불납동맹을 결의하고 목포지청에 부당이득반환소송을 제기하였다. 우근도 소작료 불납자에 재산차압을 하였으며, 1919년에는 17만원에 神波信藏에게 넘겼다. 신파는 토지 구입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德田彌七에게 하의3도 땅을 담보로 15만원을 빌렸었다. 이 과정에서 하의도민들이 직접 땅을 구입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덕전에 소유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덕전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오사카에서 인쇄업, 잡화무역상을 하면서 천진, 홍콩과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수출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이재에 밝은 덕전은 일차대전 이후 불황을 예상하고 토지매수에 나서는데, 하의도에 땅을 매입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 하의도에 덕전이 소유한 땅은 논 680정보, 밭 763정보로 모두 1,443정보였다. 덕전은 지금의 하의면사무소 자리에 관리사무소를 두고 전 육군중위 궁기헌지(宮岐憲之)를 대리인으로 목포출장소에 두고, 하의도에 전 헌병보조원인 신기빈, 전 순사 양효묵, 김영두, 장운경 등을 사무원으로 채용하고, 마름으로 우근과 화해에 앞장선 이상섭 등 현지인 3명을 지명하였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덕전은 유명한 친일테러단체 상애회의 박춘금을 동원하여 행패를 가하기도 했다.

a 오림리 뒷산의 붕알바위는 하나의 토지에 세금을 이중으로 부과하는 것에 빗대어 '양세바위'로 불렸다.

오림리 뒷산의 붕알바위는 하나의 토지에 세금을 이중으로 부과하는 것에 빗대어 '양세바위'로 불렸다. ⓒ 김준



하의농민조합을 설립하다

주민들도 1920년대 후반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사회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하의농민조합이 결성하여 권익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27년 1월 오사카에 거주하는 최용도, 고장명 등 하의도 출신 노동자 약 60여 명은 ‘하의노동청년회’를 조직하고, 6월에는 일본 노동농민당 오사카지부 집행위원 아사히 미즈이(朝日見瑞)에게 하의도농민조합의 조직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일본 노동농민당은 최용도 등을 파견해 하의농민조합 조직을 시도하였지만 덕전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조선 공산당 사건을 변호를 위해 조선을 방문한 변호사 후루야(古屋)와 정남국(완도 소안, 재일본조선인노동총동맹 집행위원장), 강소천(완도 소안, 신간회 동경지회), 최익한(대중신문사) 등이 조선에 들어왔다. 후루야는 당시 조선공산당 변호를 맡았는데, 당시 일본에까지 알려진 소안도의 사립학교 문제와 하의도의 토지문제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하였다.

강소천과 함께 소안도를 방문하고 이어 강소천, 강사원(이상 소안도 출신), 장병준, 나만성, 최용도 등과 동행한 후루야는 농민들의 토지분쟁의 전말을 듣고 ‘덕전농장 소작료 강제 차압에 대해 이는 불법 차압으로서 조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지주의 폭행’이라며 힘써 돕겠다고 했다.

마침내 1927년 12월 일본 노동농민당 미즈이 집행위원이 일본 농민조합 고문, 상임위원 2명과 하의도 출신 고장명과 함께 오사카를 출발하여 하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1928년 1월 2일 하의도민 약 3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래 일치단결하여 조선 전 무산계급의 일체의 운동과 결합하여 전 세계 무산계급의 절대적인 응원 하에 용감히 강욕(强慾)한 지주의 압박과 관헌의 간섭을 돌파하고 열악한 소작제도로부터 해방되어 광명의 대도에 나아가 전진하자”고 선언하며, 하이도 대리 내 구학교(현 기념관 자리) 내에서 하의농민조합 발대식을 가졌다. 그리고 “단결된 힘으로 농민생활의 조건을 개선하고, 합리적인 소작조건의 획득을 기하며, 토지개량, 농업기술 및 농업경영 방법의 개선의 촉진을 기하고, 조합의 조직과 확동에 의하여 농민의 문화적 생활을 완성할 것을 기한다”는 강령을 발표했다.

a 해방전 농지탈환운동을 주도했던 대리마을

해방전 농지탈환운동을 주도했던 대리마을 ⓒ 김준

하의도 농민조합은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구호부, 농사부, 교육부, 조사부, 외교부, 선전부, 부인부, 회계부 등을 두었으며 조합원이 8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이들은 경작지 재측량 실시, 생산고의 결정에 소작인 대표의 참가, 비법적인 차압절대반대, 학교 병원 및 기타 문화시설 완비, 관개의 설비. 체납 소작료 전액 면제 등을 요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덕전과 직접 소작문제를 교섭하겠다고 결의하였다. 한편 1928년에는 조선농민총동맹도 검사위원인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 박복영을 하의도에 파견해 현지조사를 하며 하의도 토지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국내와 국외 농민운동가들의 연대 속에 하의도 농민조합이 결성되지 덕전은 다시 상애회의 박춘금 일당을 불러 농민조합의 와해를 요청했고, 이들은 목포 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하의도에 들어가 농민들을 권총과 흉기로 협박했지만 오히려 과거와 달리 농민들에게 폭행당하고 도망쳐 나와야 했다. 이 일로 조합의 간부들이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아사히는 ‘치안 경찰법 위반죄’로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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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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