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만 바꿔단 '해방', 새로운 지주 '신한공사'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 - 3편

등록 2005.09.23 17:23수정 2005.09.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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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하의도 농민들에게 어떻게 다가 왔을까?


조선농민들에게 해방은 일본지주보다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악덕 ‘마름’이나 지주의 주구 노릇을 해온 동네사람들의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의도는 달랐던 것 같다. 이미 조선총독부, 법원, 경찰, 친일테러조직 등 권력으로부터 직접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해방의 의미 달랐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은 1945년 9월 22일 ‘38도선 이남지역 토지소유권은 변경이 없으며 농민들은 지주에게 무조건 소작료를 납부해야 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전 농민과 국민들의 절박한 요구를 무시하고 봉건적 소작제도는 물론 일제의 수탈체계마저 유지하는 농업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해방당시 전체 인구의 66%가 농민이었고, 총 농가의 48.9%가 소작농가이며, 총 농경지의 63%가 소작농지였다. 따라서 토지문제는 곧 전 국민의 문제이고 민족문제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삼남지방의 농민들은 소작료인하, 소작제폐지, 악질지주 축출 등을 요구하며 거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미군정은 이런 농민들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10월 5일 ‘최고소작료 경정의 건’ 즉 수확량의 3분의 1로 소작료를 인하하는 ‘3․1소작제’를 발표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일제강점기 쌀농사를 중심으로 소작료를 징수하던 것과 달리 미군정기에는 모든 곡물에 대해서 소작료를 징수해 수탈이 더욱 심했던 지역도 있었다.

a 해방 후 일본인 지주 덕전농장 관리사무소에 '신한공사 하의지부'간판이 달렸다(지금의 하의면사무소자리)

해방 후 일본인 지주 덕전농장 관리사무소에 '신한공사 하의지부'간판이 달렸다(지금의 하의면사무소자리) ⓒ 김준

미군정 포고령, ‘무조건 지주에게 소작료를 납부하라’


일본인 지주의 덕전의 농장관리사무소를 ‘신한공사 하의지부’로 간판을 바꿔단 미군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작료를 징수하는 일이었다. 일본인 지주에게도 ‘불납동맹’을 비롯해 300여 년 동안 저항해온 것 이유가 ‘내 땅에 농사를 짓는데 무슨 놈의 소작료냐’는 것이다. 그것도 일본 놈들이 물러가고 해방된 세상에서. 하의도민들은 소작료문제가 아니라 내 땅을 찾는 문제 즉 ‘농지소유권’의 문제가 수백 년 동안 싸움을 해온 이유였다.

미군정청은 군정법령 제52호에 의해 1946년 2월 21일, 일제강점기 악랄한 식민지착취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신한공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장을 미군장교로 임명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한 모든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일본정부와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 모두를 신한공사가 소유하게 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대표적으로 불이농장, 박간농장, 조선흥업 등 일본인 대농장, 회사와 일본인 개인 소유의 토지를 모두 신한공사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하의도의 덕전미칠 소유로 되어 있는 토지도 모두 신한공사 소유가 되었다. 당시 신한공사가 관리한 토지는 32만 4천4백64정보였는데, 그 가운데 경지면적만도 28만 6천 7백67정보나 되었다. ‘대지주’ 신한공사는 전체 농가호수의 27%에 이르는 55만 4천여 호에 소작을 주었는데 전라남북도의 경우는 각각 40%가 넘었다. 그리고 소작료도 해방 전의 일제가 시행한 고율소작료를 그대로 징수하였고, 심지어는 소작료를 체납할 경우 체납분을 10%의 이자까지 더해 모두 납부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6년 하의도 신한공사 직원들이 여러 차례 도민들에게 소작료를 독촉하고 협박하였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고 소작료불납과 하곡성출의 불이행을 결의하였다. 소작료를 낸다는 것은 농지소유권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이기 때문에 하의도민들은 결의는 결연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46년 7월 17일 상태도 닭머리 선착장인 계두선착장에서 소작료 징수를 위해 상륙하려는 목포부 소재 신한공사 직원과 이를 저지하려는 상태도 도민들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후 최후독촉과 협박에도 소작료징수에 실패하자, 달포 후 8월 2일 신한공사 하의지부 직원들은 목포경찰서 및 하의도분서 경찰관의 협조를 얻어 소작료 합동징수작전에 돌입하였다.

웅곡리 선착장에 도착한 이들은 2개조로 나누어 제1조 7명은 남동쪽 오림리로 떠났고, 제2조 7명은 동북쪽 대리로 떠났다. 당시 오림리는 200여 호, 대리는 500여 호로 하의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 마을에서 소작료를 징수한다면 다른 마을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당시 경찰을 앞세운 신한공사 직원들이 들이닥쳐 ‘공출’, ‘성출’을 요구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a 해방후 7.7농민항쟁의 발원지 하의면 오림리, 이후 오림리는 대리와 함께 농민운동을 이끄는 중심마을로 부상한다.

해방후 7.7농민항쟁의 발원지 하의면 오림리, 이후 오림리는 대리와 함께 농민운동을 이끄는 중심마을로 부상한다. ⓒ 김준


a 무장한 경관들이 주민들을 모아두고 무차별 폭행을 가한 오림리 사장터, 당시 이곳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했으며 퇴비더미들이 모여 있었다.

무장한 경관들이 주민들을 모아두고 무차별 폭행을 가한 오림리 사장터, 당시 이곳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했으며 퇴비더미들이 모여 있었다. ⓒ 김준

뜬금없는 무슨 소작료냐, 7․7농민항쟁

오림리에 들이 닥친 7명은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하며 노인과 부녀자들까지 붙들고 소작료를 내지 않으면 총살한다고 총을 들이대며 폭언과 협박을 자행하였다. 이 광경을 보면서 주민들 200여 명이 마을 중심지 ‘방천’(현재 오림리 경로당 자리로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방천’이라 함)으로 모여들었다. 마을에서 그림을 잘 그려 ‘화공영감’으로 알려진 김석철의 집에 들이닥친 신한공사 직원과 경찰은 김씨의 부친 김농권의 빰을 치고, 총기를 휘두르면서 소작료를 내라고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김농권은 ‘뜬금없는 무슨 소작료냐’라고 말하자, 젊은 신한공사 직원 김광산과 경찰들이 노인의 빰을 때리고 복부를 걷어차며 폭행을 가했다. 마침 김씨의 집이 방천 인근에 있어 모여든 주민들이 이를 보고 분노하여, 이희철(46, 이하 당시 나이), 박태권(18), 임창오(28), 김혁곤(23), 김용빈(21), 김병구(23), 최정만(22), 윤인수(25), 김응수(18), 임경윤(21), 임현욱(21), 김학면, 김병훈, 김자곤, 김용곤 등 청년들이 달려들어 항의하였다.

이에 경찰은 도망하면서 총을 쏜 것이 주민 박종채(20)의 머리를 스치면서 사건은 급반전되었다. 마을청년들은 인근 봉도와 어은리로 도망간 신한공사 직원과 경찰들을 쫓아가 잡아 마을 김순안 집에 끌고와 곤죽이 되고 두들기고, 권총 1자루와 장총 3자루를 압수했다. 대리에서도 마을주민들 10여 명을 호출하여 무릎을 꿇여놓고 소작료징수를 강요하였다.

마침 오림리의 소식을 들은 이들은 철수하여 오림리로 향하고, 다음날 목포경찰서는 무안과 나주경찰서의 협조를 받아 8월 3일 오림리에 도착해 사장터에 마을주민 200여명을 모았다. 오림리에 들이닥친 신한공사직원들은 동사에게 마을주민들을 집합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사장터에서 개 패듯이 두들기고 전날 농민봉기에 가담한 10명을 붙잡아 하의지서로 끌고 갔다. 대리에서도 소작료를 절대 낼 수 없다는 농민들을 구타하고 6명을 체포해 웅곡리 하의지서로 끌고 갔다.

a 경찰과 신한공사 직원들의 충돌이 일어난 마을 중심지 '방천'(지금 마을 창고와 경로당이 자리해 있다)

경찰과 신한공사 직원들의 충돌이 일어난 마을 중심지 '방천'(지금 마을 창고와 경로당이 자리해 있다) ⓒ 김준


a 경관의 발포에 의해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하의면 웅곡리 포구

경관의 발포에 의해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하의면 웅곡리 포구 ⓒ 김준

섬 내에 이들을 목포경찰서로 연행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옹곡리 선착장에서는 삽시간에 500-6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경찰과 신한공사직원들은 그들 가족까지 태우고 도망쳤다. 이 와중에 배에서 쏜 총에 맞아 신혼 농부 김지배가 사망하고 김봉남이 다리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분노한 주민들은 하의지서와 신한공사 하의지부를 불태우고 면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이 음력으로 7월 7일이라 농민들은 ‘하의도 7.7농민봉기’ ‘하의도7.7농민항쟁’이라고 부른다.

다음날인 8월 4일 군정청은 농민봉기롤 ‘공산도배의 책동’으로 규정하고, 목포경찰서 50여명의 완전무장한 경찰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당시 오림리에는 이장이 없었고 마을 일을 보는 ‘동사’가 있었다. 동사의 역할은 마을회의나 공지사항을 알리기 위해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 ‘동네사람들. 오늘 OOO일이 있습니다. 방천으로 모이십시오’등 오늘날 방송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오림리에서 200여명을 체포하고, 8월 5일에도 20명의 경찰관이 증원되어 대리 등지에서 200여명, 6일에는 무장경관 40여명이 하의도 전체를 수색하여 15-16명을 체포해 갔다. 특히 8일에는 미군부대(특파원 2명, 의료하사관 1명, 한국어 통역 및 사병 15명)가 ‘총력적인 전투태세’로 상륙하여 하의도 무장경관과 함께 경계속에 대다수의 농민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a 7.7항쟁 주모자로 체포되어 2년 형을 받은 김혁곤(당시 28), 체포된 젊은이들은 고문으로 출옥후 아편에 의지해 살아야 할 만큼 비참했다고 한다.

7.7항쟁 주모자로 체포되어 2년 형을 받은 김혁곤(당시 28), 체포된 젊은이들은 고문으로 출옥후 아편에 의지해 살아야 할 만큼 비참했다고 한다. ⓒ 김준

젊은이들 고문후유증으로 ‘아편’에 빠져 파탄하기도...

7.7농민항쟁과 관련해 오림리 이희철을 비록한 박태권과 임창오 4년, 김혁곤, 김용빈, 김경부, 최정만, 윤인수, 김응수, 임경윤은 징역 2년, 임현욱은 징역 1년을 받았다. 소작료 징수를 위해 상태도에 상륙을 방해한 상태도 농민 박필순, 박몽룡은 미군정청 법령 제 19호 및 하곡수집령 위반혐의로 5천 원의 벌금을 받았다. 그리고 경찰의 발포와 농민의 사망으로 분노하여 지서와 신한공사 건물을 불 지른 혐의로 대리 농민 김세배 징역 12년, 김춘동 징역 7년, 정화진 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다.

특히 김세배는 가혹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반면에 오림리와 대리에서 농민을 구타한 경찰 임사빈, 신판수, 정정옥, 김태화, 최윤달, 최금옥 등과 신한공사 직원 김광산 등에게는 무죄를 판결했으며, 젊은 농부 김지배를 사망케 한 경찰 발포자는 밝히지도 않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하의도 오림리와 대리에는 경찰들이 상주하며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하였으며, 젊은이들이 무시로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는 통해 마을을 피해 산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농민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 2년을 받은 오림리의 김혁곤의 동생 김왕곤(70)은 ‘오림리는 이후 한 동안 젊은 사람들 구경하기 힘들고 폐촌이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김씨의 형님 김혁곤은 일제강점기 징병으로 남양군도로 끌려갔다가 1946년 4월 귀국했기 때문에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폭도로 미군정에 의해서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김씨는 ‘군에서 총을 다루어봤기 때문에 경찰로부터 빼앗은 총을 잘 만지는 것을 기억한 신한공사 직원의 증언으로 형님이 항쟁의 주모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항쟁을 주도하고 조직할 만한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대부분 관련자들은 노인과 여성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에 분노했고, 여기에 총을 발포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오림리의 젊은이들은 고문 후유증과 무기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편에 의지해야만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었으며. 김씨의 형님도 아편으로 목숨을 의지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조사와 신안군과 목포대 임해지역개발연구소에서 펴낸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 자료집]을 참고 했음을 밝힘니다. 자료집에는 '하의3도 농지탈환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운동'(이규수), '서남해 도서지역의 농지분쟁 및 소작쟁의에 관한연구'(김종선) 등 3편의 논문과 <비변사등록>, <신문기사>, <재판기록> 등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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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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