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길, 동편 하늘의 희미한 빛 한 줄기는 희망이 된다.김남희
2005년 7월 22일 금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음료 1 + 장 본 비용 5 + 엽서 0.2 + 숙박비 기부 25 = 31.2 유로
순례자들이 다 떠나고 난 새벽거리는 정적에 싸여있다. 7시 반 미사에 참석했다. 참석자는오직 8명. 수도원에 머무는 순례자들이 전부다. 3명의 신부님들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이끈다. 9세기에 창립된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이렇게 라틴어 그레고리안 챈트로 예배드리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성당은 작고 보잘것없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허물어져가는 벽이 그대로 드러난 제단에는 오직 십자가가 걸려 있을 뿐. 파이프오르간도, 마이크도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예배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어제 점심 시간에 나에게 식사 기도를 하라고 해 송광사 공양간에 적혀 있는 글귀를 기도문으로 읊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 진리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스웨덴에서 온 마르쿠스가 그 기도문이 마음에 와 닿았다며 종이를 내민다. 절에서 공양 시간에 읊는 기도문이라고 알려준 후 어설픈 영어로 옮겨준다.
오늘 점심은 내가 준비해야 한다. 이곳의 호스피탈레로인 크리스틴이 레온에 간다며 내게 점심 준비를 부탁했다. 어제 생강 써는 나를 지켜보며 "요리 많이 해봤나보네" 하던 크리스틴이 맡긴 미션. 벌써부터 떨리고 긴장된다. 전채는 잣죽과 샐러드, 메인은 아라비아따 파스타, 후식은 과일. 양파를 사야 하고, 버섯이 있다면 좋을 텐데 구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며 마을의 작은 가게도 다녀온다.
독일인 아저씨 크리스티안이 주방 보조로 일해준 덕에 2시 정각에 완벽하게 모든 준비를 끝냈다. 한 상에 둘러앉는다. 다들 잣죽이 맛있다며 재료가 뭔지 묻는다. 양파와 참치, 옥수수, 정원에서 뽑아온 상추와 토마토를 넣고 올리브 오일과 식초로 양념한 샐러드. 마늘과 고추, 양파, 버섯을 듬뿍 넣고 정원에서 뜯어온 타임, 오레가노, 로즈메리 잎을 넣어 만든 파스타. 모두들 맛있게 먹어주니 참 고맙다. 후식으로는 수박을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으로 썰어 내놓으니 그 모양에 열광한다. 이로써 훌륭하게 일을 마친 셈인가.
저녁 미사에서 일본인 마끼야마상 부부와 나오코를 만났다. 몹시 반가웠다. 오늘 저녁 미사에서는 나도 성경을 한국말로 읽었다. 그동안은 늘 가장 많은 국적인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만 성경을 읽었는데, 오늘은 한국어와 스웨덴어로도 읽는 기회가 왔다.
미사의 마지막 순서인 성찬식 때,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힘들게 걸음을 옮겨 빵을 받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다. 한평생 그들을 이끌어 온 건 무엇이었을까.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화냈을까. 삶의 벼랑에 몰렸을 때 무엇에 의지해 그 길을 건넜을까. 삶의 끝에선 지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한 평생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무슨 생각이 들까. 살아온 삶에 만족할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