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를 짚은 채 멈춰 서서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순례자김남희
첫 햇살을 받은 밤나무 숲과 하늘. 빛과 그림자, 태양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 속에 완벽히 나 혼자이다. 레온을 지난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난 순례자들의 행렬이 부담스러웠는데, 오늘 혼자서 숲의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혼자 걷는 새벽 숲의 즐거움. 오늘 새벽길에서 내가 느낀 건 분명 환희, 삶의 환희였다. 아,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짧은가. 얼마 전 누군가 보내준 영화 '트로이'의 대사가 생각난다.
"신들은 우리를 시기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많은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이다. 너는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는 다시는 지금처럼 여기, 이 장소에 이렇게 함께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밤나무 숲을 걸어 작은 산마을을 지나니 내려가는 길이다. 나오코와 만나기로 한 프라바델로 마을에 들어서니 그녀는 없다. 한 시간이나 늦었으니 아직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여기서부터는 다시 순례자들의 물결이다. 가게에서 내 팔뚝만한 크기의 요구르트를 사서 한 병 다 마시고 출발. 날이 더워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오늘은 가방 없이 걷는 사람들이 많다. 어제 머문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가방을 택시로 배달해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서비스를 이용했나보다. 가방 없이 걷고 싶다는 유혹이 들기도 하지만, 난 이미 무릎이 아플 때 한 번 이용했고, 내 짐은 내가 메고 끝까지 가야 할 것 같다. 힘들 때마다 남의 도움에 의지하는 습관을 키우게 되면 혼자 여행하는 나에게는 치명적일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다시 시작된 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길은 가파르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오늘이 해발고도 600m에서 시작해 1500m까지 오른 후 다시 내려오는 날이라는 걸 깜빡했다. 지금껏 걸은 까미노 길 중에 오늘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하루 같다. 풍경은 아름답지만 몸이 힘드니 감동도 희미해진다.
2시 반. 집요한 오르막이 마침내 끝나고 오 세브레이로에 들어선다. 탄성이 절로 난다. 아니, 무슨 마을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5분이면 되는 작은 마을이 전부 돌로 지어졌다. 마을 여기저기에 이엉을 올린 초가집(소시지, 햄을 훈제시키는 창고)이 어여쁘게 서 있다. 1년 내내 안개가 껴 전망을 보기가 힘든 곳이라는 데 오늘은 날이 좋아 산 아래 마을이 환하게 들어온다.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호스피탈레로 아줌마가 기 치료를 해주신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시는데 나는 별다른 느낌이 전해지지 않아 그냥 얌전히 앉아 있었다. 동네 가게에 변변한 찬거리가 없어 과일과 과자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잠자리에 든다. 산티아고까지는 이제 152km!
2005년 7월 26일 화요일 흐리고 바람 불다
오늘 쓴 돈 : 아침 2.7 +과일 1 +숙박 3 +과자 1.93 +1.65 +저녁 8.7 = 16유로
오늘 걸은 길 :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23km
지난 밤, 꿈을 꿨다. 내 마음을 가져간 이가 다정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너를 좋아해"라고 고백해 왔다. "나도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고 달콤한 키스. 여기까진 완벽했는데, 그 후가 너무나 이상하다. 둘이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는데, 한 여름 날씨에 그는 이 옷 저 옷 마구잡이로 껴입은 상태이고(아마도 그의 다중인격을 설명하는 코드인 듯),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은 뚱뚱하고 못생긴,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있다(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고 콩깍지가 떨어져 나간 이후를 설명하는 걸까?).
결정타는 한 한국인 할머니의 등장. 할머니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게 내밀며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에게 "동전을 얼마나 넣어야 해?" 하고 묻다가 돌아보니 할머니가 내 노트북과 카메라가 든 배낭을 들고 사라진 후다.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가고자 하던 길을 포기하게 되는 함정에 대한 경고? 정말이지 사랑에 대한, 해석 가능한 은유가 가득한 꿈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