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철한이외다."
"조국명이오."
풍철한과 조국명이 윤건문과 백결에게 답례를 했다. 하지만 풍철한은 백결이란 사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하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앉아 있을 때는 그리 특별하게 보이지 않더니 일어나 인사하는 사소한 동작에서도 범상치 않은 풍모가 엿보였다.
(보기와는 달리 상당한 고수다!)
조국명 역시 풍철한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통성명을 하면서 출신지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상례에서 어긋난 일이다.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내세울 바 없는 집안이라면 모르되 운규룡이 대하는 태도로 보아 하찮은 집안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더구나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고 느껴지면서도 외모는 시나 읊조리고, 금(琴)을 배운 학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운규룡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주위에 눈치만 보고 있던 여자들을 향해 야단치 듯 말했다.
"뭣들 하는 게냐? 한 분도 모시기 어려운 자리에 이리 많은 영웅 분들을 한 자리에 모셔 놓고 술 한 잔 제대로 올리지 못한단 말이냐?"
그러더니 자신의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새 손님에 대한 예의로 새 잔을 받겠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운규룡의 호통에 움찔했던 여자들이 서둘러 술잔을 채웠다. 어느새 갑판 위에서 풍철한과 조국명을 안내했던 두 여자가 그들 옆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은 정말 오랜 만이군."
풍철한이 호박색(琥珀色)의 술을 한 모금 입 속에 넣고는 맛을 음미하는 듯 했다. 풍철한에게 있어 술은 정말 오랜 만이었다.
"괜찮겠나?"
조국명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란 사실은 조국명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지금까지 풍철한은 잘 참아왔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술 정도가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많이 마시지 않겠네."
풍철한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아예 눈을 지그시 감고 여전히 술맛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모습이 운규룡에게는 낯선 모양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하의 풍형이 그리된 것이오?"
"맞는 데는 장사가 없다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잘 지냈나?"
운규룡은 보란 듯이 다시 술잔을 훌쩍 들이키고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철한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모습이었는데 더 이상 묻지 않고 기묘한 웃음을 띠웠다.
"보다시피 이렇게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소."
"아직 북경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낙향한 것인가? 이젠 벼슬도 싫던가?"
풍철한의 말에 운규룡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얼굴에 번졌던 웃음 대신 씁쓸한 고소가 흘렀다.
"더 이상 동향 사람들로부터 욕 듣기 싫었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현 황상(皇上)은 강남을 버렸소. 주(朱)씨가 천하를 잡게 된 것은 강남의 지주(地主)와 토호(土豪)들 덕이었소. 헌데 그 아들은 우리를 외면하고 산서상인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는 형편이오."
"북방의 무식한 놈들이 양주까지 내려와 염(鹽)을 거래하고 있으니...... 이건 남의 집 안방까지 들어와 남의 마누라 끼고 큰소리치는 행태와 다름없지."
그 말은 윤건문(尹建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불만이 가득한 냉소적인 말투였다. 아마 강남 신안상인들의 상권을 잠식해 들어오는 산서상인과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북경 황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모양이었다. 운규룡이 말을 이었다.
"강남 최고의 부호라 이름났던 정가(鄭家)가 풍비박산 났소. 십대 자자손손 아무리 퍼 써도 마르지 않을 것이라 소문났던 집안이었소."
"정가의 몰락은 선택을 잘못한 탓이었지."
풍철한이 다시 술 한 모금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정난지사(靖難之事) 때 건문제 편을 든 정가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다. 만약 현 황제인 영락제가 패하고 건문제가 계속 황권을 쥐고 있었다면 정가의 부는 산을 이루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돈과 권력은 언제나 유착한다. 하지만 권력에 유착한 돈은 그 권력이 소멸될 때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다.
"강남의 다른 가문도 사실 다를 바 없었소. 드러내놓지 않았을 뿐이오."
"강남의 부호들은 그 동안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 않았는가?"
이러한 상권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강남의 지주나 토호들은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들의 대부분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으며 순조롭게 부를 늘려올 수 있었다. 그러다 정난의 변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지가 금릉에서 북경으로 이동되자 상권 역시 강남에서 산서나 섬서 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빼앗기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소."
풍철한은 운규룡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자네는 그 동안 많이 변했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자네는 최소한 운가에 딸린 식솔들만큼은 배불려 주겠다는 열정이 있었네. 뒷골목에서 고함을 지르며 백주를 한께 퍼 마시던 자네가 생각나는군."
운규룡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풍철한의 말은 그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젊은 날의 치기였소. 세상을 알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알게 된 것이오."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군.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족함을 알고 베풀며 살겠다던 생각을 이제 버린 것인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아시오? 만약… 만약에 말이오."
운규룡은 울화를 터트리듯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고 있었다. 본래의 좌석 분위기와는 달리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산을 다 털어 본 가에 딸려있는 소작인이나 가솔들에게 공평히 나누어 주었다고 칩시다. 그들이 그 재산을 가지고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그들 대부분은 일년을 가지 못하고 또 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할거요. 결국 세상이란 모은 자가 모으지 못한 자의 호구(戶口)를 책임지는 것일 뿐이오."
냉정한 말이었지만 일견 맞는 말이기도 했다. 부란 늘리지 않으면 줄어드는 것이다.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벌어들이지 못하면 가진 것을 써야하는 것이고, 가진 것이 없다면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가진 자네와 달리 아예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네."
"그들 몇 명을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란 말이오? 아니 그렇다고 칩시다. 그들이 기회를 가져 부를 축적하면 본 가와 다를 바 뭐가 있겠소? 단지 사람만이, 가진 자의 성씨 만 달라질 뿐이오."
인간이 모여 살면서 소유(所有)에 대한 개념이 심어지면서부터 풀 수 없는 난제다. 뛰어난 석학들이나 현명한 위정자들이 꿈꾸는 세상, 모든 이들이 공평히 잘 사는 세상은 이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종교도 마찬가지. 역사상 이상향으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종교가 수없이 난립했던 것도 그렇다.
"……!"
그 때였다. 불쑥 선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조국명은 그 사내를 보는 순간 내심 무척이나 놀랐다. 그 사내는 바로 조금 전 국수를 먹었던 반점에 나타난 바로 그 회의무복의 사내였던 것이다. 노골적으로 풍철한에게 시비를 걸려 했던 바로 그 인물.
그제야 조국명은 선실 안에 왜 사내보다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지 깨달았다. 저 인물은 반점에 오기 전 바로 이 선실 안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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