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서 서점을 찾아 헤매다

고3 수험생과 대학 1년생은 겨우 한 살 차인데…

등록 2005.09.30 07:30수정 2005.09.30 10:30
0
원고료로 응원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면 대학 교정을 산책하는 버릇이 있다. 집을 나서는 시각이 저녁 무렵이니 모교방문이라는 생뚱맞은 의미보다는 한때 질풍노도기를 거쳤던 젊음과 추억의 현장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이다. 도심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널찍한 광장과 우람한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것도 내가 대학 교정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교정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현란한 술집 간판들이 난무하는 대학가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그 환락(?)의 거리를 천천한 걸음으로 음미하면서 걷기를 좋아한다. 이런 점잖지 않는 취향에 대하여 굳이 변명하자면,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을 만큼 젊고 어린 대학생들의 싱싱한 젊음이 부럽기만 한 것이다.

교정에 들어서자 공기가 한결 신선하게 느껴졌다. 대학시절 책으로 눈을 가리고 낮잠을 즐기곤 했던 학생회관 근처 벤치에 앉아 교정을 빽빽한 숲으로 장식한 울창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저 나무가 없다면 딱딱한 회색 건물뿐인 교정이 얼마나 쓸쓸하고 삭막할까? 저 건물과 나무들의 균형이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가? 잠시 이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나는 천천한 걸음으로 교정을 빠져 나왔다.

그 다음 행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해마다 나는 교정을 나오자마자 정문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리한 서너 평 남짓한 작은 서점으로 향하곤 했던 것이다. 그곳이 대학가에 유일하게 자리한 서점이라는 점에서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작은 서점치고는 제법 볼만한 시집들을 소장하고 있어서 가볼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향하려다 말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 서점이 없어진 것이 벌써 두해 째가 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스친 젊은 대학생들의 보송보송한 얼굴과 대비된 나의 노쇠한 기억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도록 많은 술집이 빼곡히 들어찬 대학가에 딱 하나 있던 서점마저 없어져 사뭇 오랜 시간 서점을 찾아 대학가를 헤맸던 지난 설 연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탓이었다.

그날 나는 서점을 찾으러 대학가 구석구석까지 헤맨 덕분에 밤이면 환락가로 변하는 대학가의 실상을 여실히 확인한 셈이 되었다. 내가 걱정한 것은 균형이었다. 대학가에 술집이 아무리 즐비해도 근처 어딘가에 고풍스런 헌책방이 몇 군데 눈에 띄면 족할 일이었다. 삶 속에도 현실과 이상이 섞여 있듯이 대학가에도 술집과 서점이 섞여 있으면 될 일이었다.

대학가에서 서점을 찾아 헤매다보니 겨우 나이 한 살 차이로 고3 수험생은 본인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학교에 갇혀 있어야 하고, 대학 1년생에게는 방종과 타락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지는 불균형의 현실도 새삼 염려가 되었다.

그런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자 목청을 높이는 교사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치부되는 서글픈 현실은 또 어떤가? 그런 사유의 균형을 잃은 극단화의 현상 속에서 학교는 교육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주의자들의 판세로 돌아가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집에 돌아와 조카에게 푸념을 하듯 속내를 털어놓자 학교 입구에 대형 서점이 하나 생겨 그나마 대학의 체면을 살려주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서글픈 안심이랄까? 술집 백여 개에 서점 하나의 불균형이 위태롭게 보이긴 했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깁고 보탰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