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보다 재밌는 우리집 '캄캄밤 이바구'

인상이 앞니 쪼개진 날 생긴 일

등록 2005.10.22 15:06수정 2005.10.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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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방안에 네 식구가 쪼르륵 누워 있고 유일한 조명은 문풍지에 비친 달그림자. 큰 아이 인효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있잖어, 인상이 유치원 다닐 때, 화장실 앞에 '노크 하세요'라고 써 있는 걸 내가 그냥 읽어 줬는데, 계속 따라 다니며 '노크 하세요'가 무슨 뜻이냐구 묻더ㅅ…."
"너는 무슨 뜻인지 알았어?"
"아니? 몰랐지, 읽을 줄만 알고 노크가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래서 대답을 못해 줬는데, 인상이가 이번에는 저보다 더 어린, 네 살 다섯 살짜리 아이들을 졸졸 따라 다니며 묻더라구, 노크하세요가 무슨 뜻이냐구."

유치원에 한 달도 채 다니지 않았던 인상이. 녀석은 엉뚱하게도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벽만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왜 왜 벽만 바라본겨?"
"몰라."
"니가 무슨 달마대사냐 벽만 바라보게."

"인상이 너, 학교 들어갈 때 열까지 밖에 못 셌지?"
"아마 그랬을 껄? 그래도 일 학년 때 평균 88점여."
"잘난 척하기는."
"근데 조용성이 있잖어, 선생님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까지 세는 것을 서로 지켜보고 점수 주라고 했는데 내가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으로 셌는데 다 맞았다구 했다."

엉뚱한 인상이의 말에 잔머리 잘 돌아가는 아빠인 나와 인효 녀석은 키득키득 웃음보를 터뜨리지만 이해력이 늦은 아내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기 일쑤입니다.

"왜 웃어? 뭐라구 했는데?"
"하나 둘 셋을 일 이 삼 사로 셌다구."
"그게 뭐 어때서?"
"아이구, 참내 엄마는, 인상이 하구 똑같어."

우리 식구는 한밤중에, 그것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 네 명이 쪼르륵 누워 얘기를 나눕니다. 그날 그날 있었던 일, 혹은 그날 있었던 일과 연관된 아주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냅니다. 이름 하여 '캄캄 밤 이바구', 요즘 거시기한 말로 하자면 '한밤의 토크쇼'라고나 할까요?

우리 식구는 아주 특별한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날을 제외하고는 네 식구가 한꺼번에 텔레비전 시청률 늘려 주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10시 무렵이 되면 이부자리를 폅니다. 늘 한 방에서 네 식구가 나란히 흙벽 쪽에 머리를 대고 눕습니다.

아빠인 나는 '사내 대장부답게' 찬바람 솔솔 들어오는 출입문 쪽에 눕고 그 다음에 작은 녀석 인상이, 아내, 큰 녀석 인효 순으로 쪼르륵 누워 잡니다. 때로는 인효 녀석과 인상이 녀석의 엄마 아빠 쟁탈전으로 잠자리가 뒤바뀌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열 종대로 제 자리를 잡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더 재밌는 '캄캄 밤 이바구'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주로 엉뚱한 인상이 녀석 때문에 배꼽을 잡습니다. 어젯밤 역시 인상이 녀석 때문에 웃었습니다. 사실 웃어야 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인상이 녀석의 앞니가 부러진, 정확히 말하자만 앞니가 쪼개진 날이었으니까요.

그날 때마침 찾아온 손님하고 벼 베는 얘기를 해가며 차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인상이 녀석 한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빠, 나 이빨 뿌러졌다."
"뭐?"
"앞니 뿌러졌다구."
"뭐 앞니? 에이 참 새끼, 어쩌다가?"
"최백규하고 부딪혔는디, 백규는 잇몸에서 피가 나고 나는 앞니가 뿌러졌어."
"안 아퍼? 피는 안 나구?"
"아니 괜찮아, 그냥 조금 뿌러졌어."
"최백규는?"
"최백규는 안 뿌러졌어."
"정말 안 아퍼?"
"응, 하나도 안 아퍼."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지만 속은 벌렁벌렁 뛰었습니다. 녀석의 앞니는 새로 난 영구 치아였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별일도 아니란 듯이 말했습니다. 뛰어 놀다가 넘어져 생채기 난 것 정도로 말하고 있어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앞니가 부러졌다는 소리에 이것저것 따져 물을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아내가 학교에 달려가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인상이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인상이 담임 선생님은 교사로서 첫 해, 처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느려 터진 인상이 녀석을 충분히 이해해 줄 만큼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무척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인상이가 내게 그랬듯이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걱정말라고 선생님을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습니까. 최백규는 괜찮지요?"
"아, 예? 괜찮답니다."

인상이 아빠인 내가 인상이보다는 되려 인상이하고 부딪힌 최백규를 걱정하고 있자 선생님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인상이 녀석이 이빨 부러졌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나 또한 선생님에게 그렇게 차분하게 안심 시켜 주질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치과에 가서 인상이 이빨을 때우고 온 그날 밤도 역시 10시쯤 돼서 우리 네 식구는 나란히 누웠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푼수 아내는 학교로 달려갔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에 가니까, 인상이 부러진 이빨 쪼가리 줍겠다고 다들 놀래서 복도를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인상이 걱정도 걱정이지만 웃음이 다 나올려구 하더라고."
"이빨 쪼가리는 왜?"
"주어서 다시 붙여보겠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병원에 가지고 가보니까 그거 필요 없데, 그래도 고맙지 그거 줍겠다고 다들 그 고생을 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내는 걱정입니다. 인상이 녀석은 앞니 때문에 두고두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힘을 가해 붙였던 것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 붙여야 합니다. 물론 나도 걱정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내가 걱정한다고 떨어진 이빨 쪼가리가 다시 붙여질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상이 녀석에게 걱정거리만 하나 더 늘려 주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녀석이 별 것 아닌듯 받아들이고 있는데 되려 걱정거리를 보탤 필요가 없으니까요.

백규 녀석이 고추를 만지는 장난을 걸어오자 그걸 피하려다가 퍽, 부딪혔다는 인상이 녀석에게 당시 상황을 재차 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됐냐믄…."

인상이 녀석은 늘 그랬듯이 캄캄한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부지런히 손짓 몸짓으로 설명을 합니다.

"얏마, 안보여 캄캄헌디 그렇게 설명 한다구 보이냐, 그런디 퍽 부딪히고 나서 입안에 이빨 쪼가리 없데?"
"아빠 근데, 백규하구 부딪히고 나서 내 손에 보니까 이빨 쪼가니가 있길래, 나는 처음에 그게 백규 껀 줄 알았어."

역시 못 말리는 인상이었습니다. 이러니 아플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인상이 앞니가 부러진 어젯밤도 우리 네 식구는 끼득 끼득 깔깔 하하 호호 웃으며 잠들었습니다. 약간의 불안감을 껴안고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매일 매일 밤마다 '한밤의 토크쇼'를 벌이냐구요?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돕니다. 매일 매일 가족들이 이렇게 깔깔 하하 호호 끼득끼득 행복에 젖어 산다면 그야말로 행복해서 죽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해 보세요. 일 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가족들이 나란히 누워 자식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 가며 행복한 토크 쇼를 벌여 보세요. 인기 드라마, 인기 코믹 프로그램 저리 가랍니다. 적어도 부모에게 자식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웃기는 개그맨이 아닙니까?

덧붙이는 글 매일 매일 밤마다 '한밤의 토크쇼'를 벌이냐구요?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돕니다. 매일 매일 가족들이 이렇게 깔깔 하하 호호 끼득끼득 행복에 젖어 산다면 그야말로 행복해서 죽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해 보세요. 일 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가족들이 나란히 누워 자식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 가며 행복한 토크 쇼를 벌여 보세요. 인기 드라마, 인기 코믹 프로그램 저리 가랍니다. 적어도 부모에게 자식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웃기는 개그맨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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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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