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장 제마척사맹(制魔斥邪盟)
대단한 기세였다. 천마곡 입구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임시막사 들이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임시막사들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도착하는 문파 순으로 천마곡의 입구를 에워싸듯 막사를 세우다 보니 무질서해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막사 앞으로 문파를 나타내는 삼사 장 높이의 큰 깃발들이 휘날리고, 오색 천들이 사선으로 늘어지다 보니 마치 큰 잔치라도 열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미 도착한 문파도 많은 듯 짙은 어둠 속에서도 간혹 오가는 인물들이 보였다.
하기야 어디 이런 모임이 쉽게 있으랴! 이런 경우 이름 없는 문파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기회에 대문파와 밀접한 관계를 엮어 두려는 의도로 참가한 문파도 있다보니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잔치 분위기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모임이 탕마(蕩魔)를 위한 무림의 결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어떠한 깃발보다도 높게 중앙에 세워진 깃발이 유일했다. 임시로 대(臺)를 세운 곳 앞에 붉은 천에 금색 수실로 테두리를 두르고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마척사맹(制魔斥邪盟)
무림에서 마교(魔敎)로 불리는 백련교를 제압하고, 무림에 혈겁을 일으켰던 구마겁의 흉수 들의 잔당을 척결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번 무림맹은 명분만큼은 거대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이해득실과 음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마척사맹의 깃발이 세워진 뒤쪽으로 제법 큰 원형의 막사에는 새벽임에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모여 회합하는 막사였는데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형의 막사 안에는 이십여 명 정도의 인물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안에 있는 인물치고 한 문파의 장문이나 세가의 가주가 아닌 자가 없었고, 문파나 세가의 수장이라 해서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구파일방을 대표하여 소림의 광허선사(廣虛禪師)와 무당의 청허자(淸虛子), 그리고 개방의 방주인 철골개(鐵骨丐) 구한(具漢)이 나섰고, 강남 무림을 대신해 칠결방(七結邦)의 방주인 귀영무도(鬼影霧刀) 진대관(陳大棺)과 장강(長江)과 오호수로연맹(五湖水路聯盟) 등을 대표한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 자리했다.
어디 그 뿐이랴! 황보가(皇甫家)의 가주(家主)인 모화금검(謨花金劍) 황보장성(皇甫長成)과 이십년 전 무림 횡행 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던 모용가(慕容家)의 가주인 모용화궁(慕容和宮)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쟁쟁한 문파의 수장들이 있었으나, 기이한 것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獨孤文)이 직접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철혈보는 타 문파와 협력을 한다던가, 연합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여하튼 이 자리에 독고문이 자리하고 있는 한 구파일방이라도 그들 뜻대로 제마척사맹을 이끌어 갈 수는 없었다.
"흠. 이제 지금까지 숙의했던 내용을 정리해 결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
중인들의 대화가 자꾸 반복되자, 듣고만 있던 모용화궁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그 말을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개방의 방주 철골개 구한이 고개를 끄떡였다.
"옳으신 말씀이오. 더 이상 다른 방안도 없을 것 같으니... 구거사께서 정리하시는 게 어떻겠소?"
구한의 말에 중인들의 시선은 만박거사 구효기에게 쏠렸다. 구효기는 중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아래로 깔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몇 시진에 걸쳐 나눈 대화를 통해 얻어진 결론을 정리해 보겠소."
어차피 문파들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이 일을 주관할 인물로 선정된 자신이다. 여러 가지 문제는 있지만 그는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파의 위세나 이 자리에 참석한 인물들의 위세에 눌리게 되면 난처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문파나 영웅들이 있기는 하나, 결행은 사흘 뒤 새벽으로 하겠소."
구효기는 내심 긴장하면서도 되도록 감정이 섞이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퇴로(退路)의 확보요. 천마곡으로 진입하는 양쪽 면은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매복을 하거나 함정을 설치하기 어렵지만 곡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양 쪽 절벽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오."
구효기가 조리 있게 정리해 나가자 중인들 중에는 고개를 끄떡이는 인물들도 있었다. 구효기의 말이 이어졌다.
"문제는 지금 인원과 전력 모두 천마곡으로 진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오.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들께서 충분히 숙의한 만큼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기로 하겠소. 퇴로를 확보하고 뒤늦게 도착한 군웅들과 선발로 진입한 선발대를 지원하는 임무도 대단히 중요한 만큼 선사와 모용가주께서 맡아 주시면 하는 바람이오."
구효기가 광허선사와 모용화궁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아미타불.... 알겠소이다."
"선발대에서 빠져 섭섭하기는 하지만 거사의 말씀에 따르겠소."
"감사하오이다."
두 사람이 흔쾌히 대답을 하자 구효기는 가볍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좌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발대는 삼진(三陣)으로 구성하겠소. 선발대 중 가장 먼저 진입하는 일진(一陣)은 무당의 장문이신 청허자께서 구파일방의 전력을 이끌고 들어가시고. 이진은..."
그 때였다. 지금까지 회의를 참석한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이 나직한 목소리로 구효기의 말을 끊었다.
"일진은 본 보가 맡으면 안 되겠소? 본 보와 같이 들어갈 문파가 있다면 같이 들어갈 수도 있소."
나직했지만 확실히 독고문의 음성에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위명 만이 주는 무게가 아니었다. 부드럽게 바라보는 독고문의 눈길에서도 구효기는 바싹 긴장이 될 정도였다. 사실 구효기가 일진에 구파일방을 배치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어느 싸움이던 제일 앞에 나서는 문파가 피해가 큰 법이다. 만약 다른 문파를 지목한다면 지목받은 문파는 불만을 가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구파일방을 지목한 것인데, 철혈보가 나선 것이다. 오히려 구효기가 바랬던 일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철혈보의 철혈대가 와 있다. 그들이라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뚫고 나갈 것이다. 일진을 맡기에는 철혈보가 가장 적합했다.
하지만 구효기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반대할 인물도 없겠지만 그래도 반대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알겠소이다. 그렇다면 일진은 철혈보와 세가 쪽에서 맡아 주시길 부탁드리겠소."
"의견을 들어주어 고맙소."
독고문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이미 구효기의 내심을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황보장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역시 올 초 천마곡으로 조카를 보냈다가 잃은 이후로 벼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럼 이진은 구파일방이 주축이 되어 청허자께서 맡아주시고, 삼진은 방주와 채주가 맡아주시기 바라오."
칠결방의 방주와 동정채의 채주에게 말한 것이었다. 칠결방은 그리 무시할 문파가 아니었다. 정사중간의 문파 일곱 군데가 결맹을 해 내부적으로는 개별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만 외부적으로는 단일문파와 같았기 때문에 그 결집된 힘이 매우 강했다. 방의 방주 역시 일곱 명의 수장들이 모여 십년 단위로 방주를 선출해오고 있는 특이한 문파였다.
"다만 지금 이곳에서 결정된 사항은 모두 극비로 해 주시기 바라겠소. 일절 발설하지 마시고 하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만 철저히 해 주시오. 군웅들에게는 천마곡으로 진입하기 한 시진 전에 알리도록 하겠소."
정보는 곧 생명이다. 새어 나간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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