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89회

등록 2005.10.21 09:43수정 2005.10.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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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子時)가 넘으면서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더니 세차지는 않았지만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빗물은 속까지 젖어 들고 초여름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밤비는 차가운 느낌을 들게 했지만 그는 터덜터덜 걸었다.

떠난 지 사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릉 서북쪽으로 백오십 리 정도 떨어진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굳이 경신술을 사용하지 않고 밤길을 걸어 온 것은 머물렀던 십삼 년이란 세월을 반추(反芻)해 보고팠던 것일 게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 시진 정도는 더 지나야 할 것이다. 바로 지척에 있는 얕은 구릉을 지나면 늪지가 나올 것이고, 새벽에 퍼지는 물안개를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넓은 언덕이 있을 것이고, 그 언덕이 끝나는 곳에 자신이 머물던 초옥이 있을 것이다.

(과연 이곳에 머물고 있을까?)

만박거사 구효기는 분명 사부가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있다면 그가 가진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가고 싶지만 그는 오히려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

구릉을 넘어가자 넓게 펼쳐진 늪지가 보였다. 오랜 동안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고요했다. 개구리 울음소리라도 들릴만한데 구릉에서 들리던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내리는 비가 늪지의 수면을 때리는 소리가 고작이었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랑비와 함께 자칫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다. 하지만 그는 이 늪지의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떠난 지 사년이 지났다 해도, 늪지의 갈대가 무성히 자라고 나무들이 자랐다 해도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자 갈대숲이 흔들리며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늪지 건너편 초옥이 있는 언덕 끝을 바라보았지만 짙은 어둠은 멀리 산의 윤곽만 그려 놓을 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미소를 베어 물었다.

(누군가 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나지 않고 있음은 분명 누군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사부가 초옥에 있다면 그의 위세로 보아 호위 정도는 배치해 놓았을 것이다. 그는 익숙하게 말라서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갈대숲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갈대가 아무리 자랐다 하더라도 물 한 방울 발에 묻히지 않고 지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발바닥에 닿는 바위의 감촉을 느끼며 내심 새로운 감회에 젖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세월이 흐른다 해도 자연은 본래 모습을 잃지 않는다.

(기이한 일이군. 한두 명이 아니다.)

상대의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긴장하고 있었다.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리 삼엄한 경계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갈대숲을 돌자 어둠 속에서 목교(木橋)가 보였다.

목교라고 했지만 사실 나무를 베어 밧줄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늪지에 빠지지 않고 다니기 위해 사부가 만들어 놓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탄탄해 아직까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여하튼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가볍게 목교 위로 올라섰다. 늪지는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갈대와 낙엽이 덮고 있었다. 목교 위로 올라 몇 걸음 걸었을까?

투--둑---!

밧줄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목교가 약간 흔들리는 듯 했다. 그에 따라 담천의의 신형도 중심을 잡기 위해 약간 주춤거렸다. 그 순간 목교의 옆에 쌓여있던 낙엽 더미가 움직이는 가 싶더니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파공음이 들렸다.

슈우욱----

어둠과 물안개를 뚫고 날아오는 것은 비침(飛針) 같았다. 담천의는 황급히 신형을 뒤로 제기며 옆으로 틀었다. 비침이라면 독(毒)이 묻혀 있는 것이 상례다. 막으려 하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슈아악---!

하지만 밧줄이 끊어졌는지 목교를 이루고 있는 통나무들이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뒤로 제겨진 담천의의 등을 향해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흡!)

담천의는 느긋한 마음이었다가 연속되는 공격에 내심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매복하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수평이 된 채로 옆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바닥에서 한 자 정도의 높이였는데 솟구친 칼날은 하나 만이 아니었다. 곧 바로 또 하나의 칼날이 우측으로 피해 회전하는 담천의의 허리를 베어왔다.

촤르르르--- 쇄액--

동시에 그의 머리 쪽에서도 쇠줄로 연결된 두 개의 유성추(流星錘)가 정수리를 노리며 쏘아왔다.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담천의는 한 손으로 통나무를 짚으며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허리를 베어오는 칼날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바로 아래로 유성추가 공기를 뚫으며 스쳐 지나갔다. 찰나간의 일이었지만 잠시라도 지체했으면 유성추는 그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스쳐지나간 유성추가 회수되면서 반원을 그리며 뒤집어진 자세로 허공에 떠있는 담천의의 복부를 노리며 쏘아들었다.

"타--- 핫---!"

경쾌한 음성이 새벽 늪지로 울려 퍼졌다. 담천의의 몸이 허공에서 포개지며 그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따--당---!

담천의의 검은 두 개의 유성추를 튕겨내며 곧 바로 통나무 사이로 다시 솟구치는 두 개의 칼날을 향해 내리 꽂혔다.

츠으으----

통나무 바로 위에서 검과 칼날이 교차되며 쇠가 긁히는 역겨운 소리가 들렸다. 두 개의 칼날이 내리 꽂히는 검의 위력에 밀려 나는 듯 했고, 담천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칼날을 타고 밑으로 계속 내리 꽂혔다.

촤아---

고요하던 늪지의 물에 심한 파동이 일었다. 물방울이 갈라진 통나무 사이로 튀어 올랐다. 그 물방울은 붉은색을 띠고 있어 통나무 밑에 있던 누군가가 담천의의 검에 찔린 것 같았는데 신음소리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왼손으로 통나무를 살짝 짚으며 그 탄력으로 담천의의 신형은 멘 먼저 비침이 날라 온 낙엽더미를 향해 검을 긋고 있었다. 낙엽더미가 깨끗하게 두 쪽으로 갈라지며 물위로 갈라졌다. 그것뿐이었다. 이미 비침을 쏘았던 자는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듯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담천의 신형이 허공에서 크게 회전을 하며 통나무 위로 올라섰다. 나무들을 엮어 놓은 밧줄이 모두 끊어지지는 않은 듯 옆으로 퍼지기는 했지만 다른 데로 밀려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신형을 세우고는 자신을 공격했던 곳을 쭉 둘러보았다.

"……!"

하지만 없었다. 통나무 아래 늪에 몸을 감추고 있던 자들도, 유성추를 날렸던 자들도 자취가 없었다. 이곳을 들어오면서 느껴졌던 미세한 살기나 은밀하게 매복해 있다는 느낌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자들이로군.)

자신의 검은 분명 통나무 밑에 있던 자 중 하나를 절명시킬 만큼 깊숙이 살을 가른 느낌이 왔었다. 헌데 그 자의 비명도, 시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을 노린 자들이 특별한 훈련을 거친 자들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굴까? 사부의 수하들인가?)

궁금했다. 이곳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담천의가 머무르면서 보았던 사람은 오직 사부와 그의 수하들… 그리고 자신에게 전문적인 수법을 가르쳐 주던 교두뿐이었다. 이곳에 돌아 온 그를 노리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해보자는 건가? 후후… 누군지 모르지만 장소를 잘못 택했군."

담천의가 입가에 살기를 띠워 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상대는 장소를 잘못 택했다. 이곳 지리나 지형에 대해 그 보다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누가 되었든 자신을 노리는 자는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눈이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제 7 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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