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88회

등록 2005.10.20 09:19수정 2005.10.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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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천의가 피식 허탈한 미소를 흘리자 남궁산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가실 거예요?"


당연히 가야 할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뇌리로 백결이란 사내가 한 말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 지금 중원의 이목이 쏠려있는 천마곡에는 절대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마시오. 그곳은 곧 무덤이 될 것이오. --

그는 무슨 뜻으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무엇을 얼마큼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의 말대로 전 무림인들이 연합한 제마척사맹이 천마곡으로 들어가 그곳이 무덤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각 문파의 정예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구마겁의 혈사 이후로 또 한번 무림은 공백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들이나 세력이 나타난다면 한 순간에 휩쓸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백결이란 사내의 말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그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었고, 담천의 역시 돌아가는 무림정세를 전체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거대한 음모가 꿈틀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그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아무런 확증도 없이 제마척사맹이 천마곡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또한 담천의로서는 구양휘의 위험을 알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위험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역시 천마곡으로 가야했다.

"가야겠지. 분명한 사실은 제마척사맹 같은 것의 맹주 자리 따위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같이 나누어야 하는 것이 형제 아니냐?"

그의 말은 맹주의 신분이나 초혼령주의 신분으로 천마곡에 가는 것이 아닌 형제로서의 도리로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면사 아래로 남궁산산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고른 치아가 드러났다. 담천의의 신분은 변했지만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다만 아직 이곳에서 끝내지 못한 일이 있으니 먼저 출발하도록 해라. 나 역시 나흘 후에는 진성현에 도착하도록 해 보마. 만약 내가 늦더라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도록 해라. 내가 찾아가도록 하겠다."

지금 그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 있다. 사부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특별한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자신의 부친을 살해한 흉수가 사부라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는지 모른다. 그것 때문에 여지를 두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거예요."

남궁산산이 활짝 웃으며 송하령을 바라보았다. 아마 송하령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송하령을 곤혹스럽게 할 일들 말이다. 이별의 아픔은 가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림으로 인하여 잠시만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
쾅--! 쨍그랑---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는 통에 찻잔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탁자를 내려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연병문은 좀처럼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극도로 화가 치밀어 있었다.

"두 눈 뜨고 그 놈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는 게야?"

이곳이 어딘가? 궁궐 안이었고, 더구나 천관의 영역 내였다. 헌데 감금하다시피 감시하고 있던 전연부와 조궁이 빠져 나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부가 천비수(天匕手)란 외호를 가지고 있을 만큼 뛰어난 고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조궁 역시 내력을 알 수 없는 무공의 소유자임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두 사람을 최소 오십초 안에 제압할 수하들이 최소 이십여 명이 넘는다. 그런데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세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 있었고, 호위무사 다섯 명이 혼절해 있었습니다."

"방조자가 있었단 말인가?"

연병문의 물음에 좌후범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솜씨로 보아 방조자가 있었음이 분명했지만 섣불리 대답할 사안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들이야 고수라면 수혈을 짚어 잠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세 명의 수하는 이름 있는 무림고수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방조자가 없었다면 그들 능력만으로 빠져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헌데 그게…."

좌후범은 말하기 어려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은 윗사람이 사태를 판단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유도할 수도 있다. 추측은 다양한 가능성의 단서만 제공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말해 봐."

연병문은 답답한 듯 아직까지 억양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사실 당황하고 있었다. 함태감의 의중을 떠보려고 했지만 함태감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전연부에게 분명 보고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뭔가 묻기라도 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함태감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연병문은 하는 수 없이 전연부와 조궁을 잡아 들여 그 내막을 캐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헌데 그들을 잡으려 했던 어둠이 내리는 그 시각 전연부와 조궁이 눈치를 채고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수하들은 모두 목 줄기에 가느다란 혈선(血腺)만 그어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목이 잘린 것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인가?"

"절정고수가 아무리 예리한 칼로 목을 베더라도 절명한 후에는 목이 분리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목이 베어진 후에도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목이 잘리지 않았다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좌후범의 말에 연병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연병문은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퍼뜩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 보게."

"죽은 후에도 목이 계속 붙어있을 정도라면 전설적인 기병(奇兵)의 예리함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림오대기병(武林五大奇兵)을 말하는 겐가?"

"그런 정도여야 합니다."

연병문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미세한 살기를 뿜었다.

"자네는 지금 상대부의 은린비(銀鱗匕)에 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좌후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잠시 후면 자네 입에서 상대부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 나올 것 같군."

좌후범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분명 수하들의 시신은 은린비에 당했다고 외치고 있었다. 더구나 상대부는 천관 최고의 고수로 그가 아니라면 그리 간단하고 깨끗하게 세 명의 수하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추적해… 자네가 직접 수하 전부를 동원하더라도 전연부와 조궁을 잡아와. 방조자가 누군지 반드시 확인하기 전까지 돌아올 생각을 마."

악을 쓰는 연병문의 목소리는 쉰 듯했다. 말끝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뇌리 속에 한 가지 심각한 의문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백결… 이 자가 정말 실수한 걸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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