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91회

등록 2005.10.25 08:40수정 2005.10.2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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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구효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벽 공기를 가르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악----!"


연이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적이다…!"

"놈들이 중앙으로 가고 있다. 막아라…!"

갑작스런 소란은 막사에 앉아있던 인물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게 했다. 동정채(洞庭寨)의 채주인 철부왕(鐵斧王) 나정강(羅晸康)이 급히 막사를 나서는 것과 동시에 모두 빠르게 막사를 나서고 있었다.

"저쪽은 본가를 비롯한 세가들이 머무는 곳인데…."


모화금검(謨花金劍) 황보장성(皇甫長成)이 노기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리며 신형을 날렸다. 이어 모용화궁 역시 얼굴을 굳히며 바싹 뒤를 따랐다. 횃불이 이곳저곳에서 밝혀지며 일순간에 주위는 대낮처럼 환해졌다.

어느새 수십여 명의 군웅들이 상대들을 에워싸고 병장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헌데 한결같이 회의 무복을 걸친 상대들은 겨우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 떼들 속의 이리들처럼 좌충우돌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군웅들을 향해 광폭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헛…!"

"으… 미친 자들이다!"

군웅들의 입에서 두려움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적들의 눈빛은 정상적이 아니었다. 흰자위가 번뜩이고 있었고, 자신의 생사는 아예 도외시한 채 군웅들을 향해 치명적인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퍼-- 퍽----!

회의인 중 한 명이 가슴에 정통으로 장력을 맞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회의인은 입에서 선혈을 뿜으며 장력을 날린 인물의 옆구리에 꼬챙이처럼 생긴 기형도를 쑤셔 넣었다.

"어억----!"

장력을 날린 인물은 하북 팽가의 팽문요(彭雯拗)란 인물로 팽가의 비전인 건곤신장(乾坤神掌)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장력을 맞고 입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상대를 보고 잠시 멈칫하는 사이 도에 찔린 것이다.

팽문요는 옆구리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다시 찔러오는 도를 보며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저건 인간도 아니었다. 건곤신장은 겉보기에 그리 위력이 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맞으면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무서운 장법이었다. 주저앉아 내장쪼가리와 함께 피를 쏟으며 죽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몸을 뒤집으면서 좌측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사실 죽기보다 더 싫은 나려타곤의 수법이었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슈우우----

그 순간 어디선가 가공할 검기가 피어오르며 도를 찔러오는 상대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불빛에 비친 검기는 마치 무지개처럼 영롱한 빛을 뿜으며 반원을 그렸다.

"황보가주다!"

군웅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모화금검이란 명호답게 휘황한 검기와 더불어 황보가의 가주 황보장성의 검은 팽문요를 향해 찔러오는 상대의 손목을 끊고는 그의 목을 분리하고 있었다. 손목을 끊은 것과 목을 벤 것은 마치 한 동작처럼 빠르고 매끄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목이 떨어진 후에도 상대는 단숨에 쓰러지지 않은 채 피를 뿜고 있다가 목 없는 몸을 흔들거리더니 통나무가 넘어가듯 쓰러졌다. 그 뿐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역시 모용가주의 검은 무섭군."

"헌데 저 작자들은 어찌된 인간들이기에 허리가 베어져도 꿈틀댄단 말인가?"

이십여 년 전 이미 중원을 뒤흔든 검이었다. 모용화궁의 검은 이미 두 명의 회의무복을 입은 인물들을 절명시키고 있었다. 그의 검은 황보장성의 검과는 달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웅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그의 검과 마주치는 것은 무엇이든 부러져 나가는 것 같았다.

한 순간에 상황은 끝났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다섯 구의 시신이 놓여졌고, 기이하게도 제대로 모양을 갖춘 시신은 없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목이 분리된 것이 태반이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장내를 뒤엎고 있었다.

"…!"

하지만 이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한 순간에 모두 죽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남겨준 충격은 컸다. 죽음을 도외시한 채 달려드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불길함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찌된 일인가?"

모용화궁이 한 중년인을 보고 물었다. 모용가의 총관인 길건유(佶乾侑)라는 인물이었는데 매우 차갑고 냉정한 얼굴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고는 무림세가들이 머물고 있는 막사 주위에서 터졌기 때문에 그에게 물은 것이다.

"저들은 천마곡에서 나왔습니다. 입구에 경비를 서던 우리 측 두 명이 순식간에 당했고, 본가 막사를 지키던 수하 세 명 중 한 명이 절명, 두 명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다섯 명 모두를 척살했지만 중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팽문요를 합쳐 이십여 명 정도가 부상당했고, 일곱 명이 죽었다. 모용화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떡이더니 한 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구효기 일행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중얼거렸다.

"겨우 다섯 명을 보내 이 난장판을 벌릴 이유가 뭘까?"

모용화궁이 중얼거림에 동정채의 채주인 나정강이 자신의 병기인 철부(鐵斧)를 갈무리하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번 떠 보자는 것 아니겠소? 우리 쪽 동태도 살피며 말이오."

상황으로 보아 합리적인 말이었다. 많은 자들이 기습한 것도 아니었고, 소수가 이런 난장판을 만들었다면 이 쪽 대응이나 전력을 간파하기 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기 쉬었다. 하지만 구효기는 고개를 저었다.

"나채주의 말씀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나…."

그는 말을 잠시 끌면서 중인들을 쭉 훑어보았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려는 것이 목적이오. 보다시피 이들은 정상인들이 아니었소. 자신들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팔다리가 잘려도 악착같이 달려들었소."

중인들의 얼굴에는 그렇지 않아도 은은하게 두려움이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가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부르짖었다.

"시검사도(屍劍邪刀)!"

절대구마의 구마겁 이후 백삼십년 전 혈검문의 혈사가 다시 떠오르는 듯 했다. 구효기는 말한 자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시검사도는 아닌 것 같소."

그는 치료를 받고 있는 팽문요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검사도라면 팽문요를 비롯한 부상을 당한 인물들의 몸에 조짐이 나타나야 했다. 다른 사람들을 아직 확실히 살펴보지 않았지만 팽문요에게 중독이 되었다거나 몸에 반점이 나타나는 현상은 없었다.

"아마 과거 절대구마 중 혼마(魂魔)의 제혼대법(制魂大法)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오. 약물과 사악한 사공을 사용하면 이성을 잃고, 주입된 사고(思考)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오."

구효기의 말에 중인들은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내심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제혼대법도 대법이지만 시검사도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시검사도였다면 지금 부상 입은 사람들의 몸은 목내이처럼 변해갈 터였다.

구효기의 지적은 정확히 맞았다. 아무리 자신이 호걸이라고 떠들고 다녀도 목숨은 누구에게나 귀중한 법이다. 어쨌거나 그 뒤로 구효기의 말은 이어졌지만 몇 시진이나 끈 최종적인 회합은 종결한다는 말도 없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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