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25일 오후 청와대에서 각 부처 정책홍보관리실장 및 관리관 50여명과 간담회를 가졌다.연합뉴스 김동진
케케묵은 갈등이 도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 부처 정책홍보관리관과의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시비거리가 되고 있다.
"권력이 분산된 사회에서 권력의 핵심적 수단은 말, 정보다. 다양한 거버넌스 사회에서는 보다 더 많은 권력이 언론에 집중되고 있다. 이전에는 언론은 비판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사회의 방향 결정에 기여하는 만큼 언론도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그래서 "언론도 견제 받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게 노 대통령의 말이다.
여기까지는 별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노 대통령은 "견제 받는 환경"을 거론하면서 "언론의 잘못된 의견에 대해서는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8월 30일에 국정홍보처가 만든 '정책홍보 업무처리에 관한 기준'을 적극 두둔했다.
"정부 정책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보도를 지속하는 매체에 대해서는 공평한 정보 제공 이상의 특별회견·기고·협찬 등 별도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대해 노 대통령은 "왜곡을 일삼는 언론에 대해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말라는 것이지 일반적인 서비스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문제없다"는 취지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참여정부의 이런 규정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청와대가 최근 <조선일보>에 기고한 중앙인사위원장과 국무조정실장,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문화재청장을 상대로 기고 및 인터뷰 경위를 따지고 해당 부처에 내부 감사 보고서나 경위 보고서를 요구했다며 이런 행위를 "정신 나간 짓" "불법 도청보다 더 범죄적인 행동"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언론과 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악의적 왜곡 보도의 명시적 기준이 없는 정책홍보 기준은 결국 '고무줄 잣대'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의 취재를 제한하는 부당한 지침"이라고 비난했다.
<조선>·<동아> 주장에서 논리적 흠결 찾긴 쉽지 않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주장에서 논리적 흠결을 찾긴 쉽지 않다.
"악의적 왜곡 보도의 명시적 기준"을 요구하는 <동아일보>의 주장은 타당하다. 행정조치는 법률과 하위규범의 규정에 근거해 이뤄져야 하고, 그런 규정의 첫째 덕목은 명시성이다. 행정주체의 편의와 의도에 따라 규정이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주장은 공허하다. 원론에서 벗어나 현실로 들어가면 "명시적 기준"이 성립될 여지는 거의 없다. 무한대에 가까운 개개 사례를 관통하는 보편타당한 기준을 만든다는 건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보편타당한 사회적 덕목에 기초해 법률을 제정하면서도 해석과 적용의 여지를 인정해 검찰과 법원을 분리하고, 다시 법원의 판결을 3단계로 나눈 이유가 뭐겠는가
그런 점에서 <동아일보>가 요구한 "명시적 기준"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럼 <동아일보>의 주장은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좀 더 근원적인 점을 짚었어야 했다.
국정홍보처의 '기준'에 따르면 '견제'의 대상으로 두 가지를 꼽고 있다.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경우, 그리고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보도"다. 이 가운데 후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사실'은 특정언론의 의도·견해·사상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기준'을 설정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현저하게 사실과 다르다고 '확인'되면 정정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법에 호소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일부 언론이 참여정부 들어 중재신청 건수가 폭증했다며 이를 '언론 탄압'으로 몰고 가는 듯한 보도를 한 것은 '의도적인 오버'다.
문제는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경우"다. '왜곡'은 '본질'이란 개념을 전제로 한다.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주장하는 경우를 일컬어 '왜곡'이라 한다. 따라서 '왜곡'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는 본질을 보았다"는 '확신'이 전제돼야 한다. 다툼은 여기서 발생한다.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닌 이상 동일한 사실을 놓고도 전혀 다른 주장과 견해가 제시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영역에선 실험을 하고 여론시장에선 토론을 한다. <조선일보>가 언론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참여정부에 들이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은 "언론의 잘못된 의견에 대해서는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정부도 "잘못된 의견"에 "잘 된 의견"을 들이댈 권한과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의 말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토론의 범주를 벗어나 '반(半)물리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다.
노 대통령은 브리핑이나 보도자료 배포 등과 같은 공평한 정보제공은 차별을 두지 않으니까 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기고나 인터뷰, 협찬과 같은 특별서비스를 하고 안 하고 정도의 권한은 정부에게 있는 것 아니냐는 입장도 함께 개진했다.
특별서비스 거부, 감 놔라 대추 놔라할 성질의 것 아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틀렸다. 특별서비스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참여정부가 일률적 기준을 정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부 부처마다, 특정 정책마다 의견의 갈림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특별히 보수층이 반발하는 사안, 진보층이 거부하는 사안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정부 부처는 특정 반발층을 설득하기 위해 '특별'한 방식을 택할 자유와 권한이 있고 그 통로로 특정층을 대변하는 언론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고나 인터뷰는 '특별 서비스'일 수도 있지만 특정층에 대한 특별한 호소 창구를 얻었다는 점에서 '특별 혜택'이 될 수도 있다.
중앙인사위원장이나 국무조정실장, 문화재청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하거나 인터뷰를 했다고 문제 삼을 게 아니라 그들이 <조선일보>를 통해 뭘 말했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안티조선'이 기고와 인터뷰 거부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이 경우와 정부의 경우를 등치하는 건 맞지 않다. 민간인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건 자유다. 민간인이 국민 구성원 모두를 향해 의견을 개진할 의무는 없다. 그래서 '안티조선'의 기고·인터뷰 거부운동은 자발성과 자율성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정부는 다르다. 정부 정책이 전 국민의 100% 지지를 끌어낼 수는 없겠지만 정책 결정 전 단계에서 모든 국민에게 고르게 정보와 입장을 전해야 할 의무를 지는 건 사실이다. 민간인은 특정 언론의 특정 의견이 "잘못됐다"고 느낄 때 아예 안 보고 안 들을 자유가 있지만 정부는 "잘못된 의견"을 지적하고 "잘 된 의견"을 개진할 의무가 있다. 특정 언론 뒤에는 특정층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국민이다.
물론 정부로서도 할 말은 있다. 여러 번 지적하고 때론 토론하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악의"에 입각해 왜곡을 지속적으로 자행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라는 반론을 제기할 법도 하다.
울림은 있지만 틀린 건 틀린 것이다. 보호 감호를 없앤 게 바로 참여정부다. 특정 언론이 "악의적 왜곡"을 자행한다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그 언론 제호에 '주홍글씨'를 새길 순 없다. 그건 오로지 국민 개개인의 자유의사 영역 안에서만 이뤄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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