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오?"
갑자기 밤을 새며 마신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전월헌은 목이 탄 듯 들었던 술잔을 입에 툭 털어 넣고는 자신의 둘째 사형인 백결을 똑바로 주시했다.
"이 우형은 그나마… 끄윽… 네가 직접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형…!"
"종리추(宗理錐) 만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어. 크윽… 또한 그를 죽여서도 절대 안돼."
백결의 얼굴은 이미 술에 취한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본래 술을 잘 하지 못하는 그는 이미 자신의 주량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혀가 꼬이고 트림과 딸꾹질이 간간이 이어졌다.
"그 자에게는 이제 도와줄 자들이 없소. 균대위를 모두 화북 쪽으로 이동시킨 그 자의 오만은 그 자의 명을 재촉했소."
"오만…? 이 우형이 보기에 그는 오만할 자격이 있다. 그는 네 아래가 아니다. 네가 만약 그 자를 죽이기 위해 보낸 수하들이 너를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전력이라면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전력을 다할 때 상대할 수 있다면 그들은 돌아오지 못할게야."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살수란 무공만으로 상대를 살해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둘째사형은 사영천의 살수들을 모른다. 안다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사형. 취하셨소."
"정신은 말짱하다."
술 취한 사람이 자신에게 술이 취했다고 하면 변명하는 상투적인 말이다. 술 취한 사람은 절대 자신이 취했다고 말하는 적이 없다. 지금 상태로는 누가 보더라도 백결이 취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너를 비롯해 사제들은 언제나 이 우형을 탐탁치 않게… 끅… 생각해 왔을 게야. 도움이 되는 것이라곤 세치 혀를 나불거리는 것뿐이었으니까."
나이 들어 무공에 입문했기에 대사형은 물론 몇몇 사제들의 수준에 못 미쳤다. 외부로 떠도는 시간이 많았기에 사형제간 돈독한 우의(友誼)도 쌓지 못했다. 둘째라고는 하나 중대한 결정에 참여하거나 막중한 책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오. 사형. 솔직히 어렸을 적에는 그랬을는지 모르오. 지금은 아니오. 사형이 아니라면 많은 일들을 해결할 수 없었을 거요."
"크큿… 그 일들의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끅… 이용당하는 일이었지."
혀는 꼬부라졌으나 역력하게 자책과 자조의 기색이 담긴 음성이었다.
"사형!"
전월헌이 짜증이 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작하는 사람이 먼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을 참기란 쉽지 않다.
"귀먹지 않았다."
말과 함께 백결은 자신의 술잔을 들어 마시려 했다. 전월헌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술잔의 술이 흔들리면서 백결과 전월헌의 손을 따라 흘렀다.
"많이 취하셨소. 그만 하시오."
백결이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어차피 취하고자 먹는 술이다. 끅… 더 먹는다고 얼마나 더 취하랴. 끅… 더 취해야 네가 이 우형을 베기도 쉽겠지?"
갑작스레 이 무슨 말인가? 전월헌의 눈 깊숙한 곳에서 경악에 찬 빛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백결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던 손을 놓았다.
"사형…!"
백결은 잡혔던 손이 자유롭게 되자 반 쯤 남은 술잔을 입에 훌쩍 털어 넣었다.
"셋째겠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천마곡을 떠나오던 날 방백린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은밀하게 부탁했다.
-- 백결 사형이 딴 마음을 가진 것 같다. 네가 확인해 주었으면 한다. 만약 백결사형이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판단되거든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결정해라. 백결 사형은 입 하나로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믿을 수는 없었지만 전월헌은 확인해야 했다. 전날 늦은 저녁부터 세시진 동안 술을 마시면서 몇 번이고 백결의 마음을 알고자 했지만 혼동만 가중되고 있었던 터였다. 결국 백결의 마음을 읽으려했던 것이 자신의 마음만 읽힌 결과가 되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살생부(殺生簿)… 그것도 역시 셋째가 주었겠지. 네가 담천의 그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도 역시 셋째가 일러 준 말이었고…."
"대사형과 운령하고 상의한 일이오."
"네사 직접 운령에게 확인했느냐? 대사형 역시 담천의 그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더냐?"
전월헌의 머리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았다. 방사형은 재촉했고 그는 방사형을 전적으로 믿었다.
"헌데 왜 네 말대로 반드시 먼저 죽여야 할 자를 살생부의 마지막에 적어 놓았을까? 제일 먼저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을 나열함에 있어서는 제일 먼저 기재해야 하는게 상식이 아니더냐?"
"결정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점차 확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전월헌 역시 대사형이 개봉으로 왔을 때 운령과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었다. 대사형은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좀처럼 바꾸는 법이 없다. 대사형은 담천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분명 반대했다.
"운학이 실종되었다. 그 사실은 알고 있느냐?"
"철혈보 놈들에게 당한 것이라 들었소."
"어떻게 알았을까? 섭노야와 운학 일행이 연동으로 나간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우리 말고 연동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을까?"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다 해도 우연히 발견되었을 수도 있소."
"그렇게 빨리…? 그리고 그렇게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었을까?"
"섭노야가 계시지 않았기에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할 수도 있소."
"너는 그러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철혈보 놈들을 뒤쫓지 않았지?"
"강명 사형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취한 눈으로 백결이 전월헌을 바라보았다. 애잔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속내를 알기 힘든 눈빛이었다.
"한 가지만 묻자."
"이렇게 된 이상 소제 역시 사형께 여쭈어 볼 일이 많소."
전월헌은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언변으로는 둘째사형의 속내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된 바에는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먼저 말해 보거라."
전월헌은 내심 마음을 굳혔으면서도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그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형의 본명이 송결(宋缺)이 맞소?"
(제 71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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