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의 섬, 항일의 섬 '신지도'

신지도의 역사

등록 2005.11.04 19:44수정 2005.11.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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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과 어장이 좋고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짓기 좋은 섬, 신지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가장 가깝고 뱃길도 좋아 완도생활권인 신지는 오일시장이 서지 않는 섬이다. 외부에서 신지로 들어오는 뱃길은 완도읍에서 들어오는 물하태나루터와 강독나루터, 청산 등 바깥 섬과 연결되는 동고나루터가 있지만 과거에는 삼마리의 나루터를 이용했다. 삼마루에는 조선시대에 목장이 있었고, 인근 송곡에는 진이 설치되어 외부와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삼마동(三馬洞)은 과거에 상마동(上馬洞)으로 불렸으며 말을 길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신지도가 문헌기록에 처음 등장한 <동국여지승람>(1481)에는 완도, 고금도, 조약도 등 13개의 섬과 함께 전라도 강진현의 부속도서로 소개되어 있다. 당시의 지리지에 섬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오히려 중앙행정력의 통제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각종 부세로부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왜구의 잦은 출몰로 여말선초에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의 과정에서도 생활이 어려운 유랑민이나 관리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섬'은 기회의 땅이고 새로운 삶터였다. 중앙의 통제와 관리가 시작되면서, 지리지에 이름이 기록되기 시작하고 수군진이 설치되면서 이들에게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을지도 모른다.

고문헌에는 신지도를 '지도'(智島)로 표기하고 있다. 현지주민들은 신지도를 '지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지명을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지도로 표기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나주목에 속했던 지도(현 신안군)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신지도(新智島)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신지도의 한자 이름이 '땔나무 신'(薪)으로 변한 것은 숙종대 이후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도서지역까지 중앙의 통제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 내륙에 이던 수군진이 도서지역으로 이설되고 섬에도 군현의 행정치소와 관방시설이 설치되면서였다. 신지도에 관한 <동국여지승람>에도 '신지도는 둘레가 90리이며,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때 200여 개에 이르던 목장은 화포 등 무기의 발달로 말의 쓰임새가 줄어들고 농지로 전환하기도 하여 119개로 줄어들었으며, 이중 전라도에 가장 많은 39개의 목장이 있었다. 신지도의 목장도 이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이것마저 농토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서남해의 섬들이 근대 이전에 중앙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죄인들의 유배지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서 섬은 목장, 수군진의 관리들의 땅이 되어갔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동원해 만든 농지는 권문세도가들의 생활기반으로 전락했다. 많은 도서들이 왕실이나 권문세도가들의 절수지 혹은 소유지로 변한 것들도 같은 이유였다. 신지도에도 목장이 설치되고 둔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a 정약전이 흑산도로 가기전에 머물렀을 송곡리, 이곳은 항일운동가 장석천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가기전에 머물렀을 송곡리, 이곳은 항일운동가 장석천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김준


유배의 섬

조선시대 사형 다음으로 큰 형벌은 유배였다. 당시 유배지를 기록한 <일성록>(정조 19년 윤2월 29일)의 의금부의 배소책자(配所冊子)에 의하면, 유배지로 수로가 멀기는 추자도와 흑산도 그리고 제주도 등 삼도를 빼면 고금도와 신지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신지도가 중죄인을 유배 보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등 다섯 가지의 형벌이 있었다. 사형을 면한 유배(유형)에도 2천리, 2천5백리, 3천리 등 3등급으로 나누어졌다. 유형은 천도, 부처, 아치로 구분하는데 천도는 죄인을 고향에서 1천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이며, 부처는 정상을 참작하여 일정지역에서 지내게 하되 유배지 현감에게 책임을 맡기는 벌이다.

안치는 왕족이나 고관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유배지에서도 일정장소에 격리시켜 거주의 제한을 가하는 벌이다. 안치에도 죄질에 따라 가벼운 죄를 짓는 죄인을 고향에 유배시키는 '본향안치', 무인도나 먼 섬에 안치시키는 '절도안치', 중죄인의 경우 죄인이 적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어 연금조치하는 '위리안치' 등이 있다.

이외에 태평과 장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경우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이다. 태형은 10대에서 50대까지, 장형은 60~100대까지 각각 다섯 등급으로 나누고 곤장은 일반적으로 물푸레나무를 사용하였다. 도형은 비교적 중한 죄를 범한 자를 관에 붙잡아 두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징역형과 비슷하였는데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까지 기간이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었으며 각각에 장60, 장70, 장80, 장90, 장100형이 수반되었다.

완도 바로 옆에 있는 신지도에 아직 고증이 필요하지만 40여명이 유배되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려진 인물로 나주 괴서사건(1755)으로 함경도 부령과 진도를 거쳐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한 원교 이광사, 신유박해로 아우 정약용과 함께 유배형을 받은 정약전도 흑산도로 가는 도중 신지도 송곡마을(추정)에서 약 8개월 정도 머물렀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다 그들의 계략에 의해 신지면 대평리에 철종11년(1860년) 유배된 왕족 이세보도 4년여 살다 해배되어 갔다. 특히 이세보는 신지도 유배지에서 이 생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신도일록>(薪島日錄)을 남겼다. 이 기록에는 장성 갈재를 넘어, 북창, 나주, 영암, 강진, 마도진, 고금도, 신지도로 이어지는 유배길이 기록되어 있다.

종두법으로 잘 알려진 송촌 지석영도 고정 24년(1887) 송곡리에 유배되어 5년여를 신지도에 머물렀다. 유배되어 온 분들이 머물렀던 곳은 송곡과 대평리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모래밭 명사십리와 청산도까지 뚫린 바다, 그리고 신지도에서 가장 넓은 농지가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낙지를 비롯한 갯것들이 지천으로 널린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다. 아무래도 유배한 자들의 주거지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인근에 이들을 관리 혹은 감시할 송곡진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a 신지항일운동기념탑

신지항일운동기념탑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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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항일의 섬

유배의 섬 신지도는 일제강점기에는 소안도와 함께 저항의 섬이기도 했다. 신지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는 광주와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한 송곡출신 장석천과 완도와 신지에서 항일운동을 한 임촌 출생 임재갑이다.

특히 임재갑은 1925년 소위 '신지도 강습소 사건'으로 유명하다. 임재갑은 신지면 대곡리에 '신지학술강습소'(재판기록참조)를 만들어 교원으로 신지면 신상리, 월양리, 공도리, 송곡리, 신리, 대곡리를 순회하며 민족의식 고취교육을 했다는 혐의로 형을 살기도 하였다. 명사십리가 내려다보이는 대곡리 구릉에는 1994년 이들의 뜻을 기리는 '신지항일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대표적인 신지출신의 항일운동가로 꼽히는 두 분의 활동내용을 옮겨 보았다.

3·1독립만세운동을 전후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완도군 신지면 출신 임재갑·장석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 구국운동을 후세에 알려 자라나는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시키고자 건립하였다.

임재갑 선생은 완도 신지 출생으로 1911년 안창호가 주도한 청년학우회와 구국청년계몽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완도군 신지면에서 명신서원을 설립해 농촌청년 계몽운동을 펴기도 하고,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국내를 수차례 드나들며 김좌진 휘하에서 무장전투요원으로 활약했다.

완도 신지 출신인 장석천 선생은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에 가입, 사회활동을 펴면서 항일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광주지역 항일학생운동에 관계 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투쟁을 지원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항일투쟁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다가 일경에 잡힌 그는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른 후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폈다.

더 많은 기록검토와 현지조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명사십리로만 알려진 신지도에는 조선시대의 유배자들의 흔적과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의 뿌리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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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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