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03회

등록 2005.11.10 08:20수정 2005.11.1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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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전월헌은 성급할 정도로 결단이 빠른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어쩌면 주왕을 노려보기도 전에 종리추와 그 수하들은 담천의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세운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그리 신신당부 했거늘… 백사형 건은 처리했는지 모르겠군.)


전월헌은 그런대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자신이 건네 준 살생부의 인물들 칠팔 할은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담천의와 백결 건이었다. 백결이라도 완전히 제거했다면 좋으련만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직 제거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유항이 탁자에 놓인 전서구를 보다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당신은 좀 조심할 수 없나요? 등이 흔들리니 정신이 사납군요.”

깨알 같은 음호는 대낮에 보아도 혼동이 되는데 등이 흔들려 읽기가 거북했던 탓이었다. 그녀의 말에 생각에서 깨어난 방백린이 힐끗 등을 둘러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의 시선이 지나가자 등은 어느새 흔들림을 멈췄다.

헌데 기이한 것이 다른 것은 똑바로 내려져 서 있는데 반해 유항의 뒤쪽에 걸린 등은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구멍이 나 있는 등의 아래쪽이 전서 위를 향하고 있어 불빛을 직접 받을 수 있게 비스듬하게 멈춰진 것이다.


어떠한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저렇게 비스듬히 등이 세워져 있기는 만무하였다. 오히려 저렇게 세워진 등이라면 잘못 만들었다고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유항은 방백린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큰일이에요. 당신의 염화심력은 이제 무의식중에도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여주니 말이에요. 더구나 사람 마음까지 홀리니….”


불빛에 비친 유항의 모습은 고혹적이었다. 하얀 피부에 벽안은 불빛에 일렁거려 보석처럼 타오르는 듯 했다.

“내가 당신을 홀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홀리고 있군.”

방백린의 말에 유항은 눈을 샐쭉하니 흘기며 입을 내밀었다. 은근한 색기가 불빛을 타고 그녀의 얼굴에 흘렀다.

“헌데 어찌할 셈이에요?”

그녀는 전서를 내려놓으며 언뜻 걱정스런 기색을 띠웠다. 기울여져 있던 등이 비로소 똑바로 내려뜨려졌다.

“무얼…?”

“언제까지 대사형 하시는 대로 두고 볼 셈이냐구요?”

방백린 역시 답답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사형의 태도는 모호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듯 했다. 운령 역시 마찬가지. 그 두 사람의 의도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정면으로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그들이 본 곡 안으로 진입했어요. 계속 밀려들어올 것이고요.”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우리와 생각은 다르지만 적절한 방책일 수도 있어. 운령이 잘 대처하겠지.”

대사형의 생각이 굳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대사형의 태도는 변수였지만 그 변수까지 이미 고려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 운령의 이름이 나오자 유항이 다시 방백린을 흘겨보았다.

“당신은 대사형은 믿지 않아도 그 아이만큼은 여전히 믿고 있군요.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길을 가는 아이예요.”

방백린이 다시 피식 웃었다.

“당신은 마치 질투하는 것 같군.”

그 말에 유항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면 정확한 말일지도 몰랐다. 여인의 육감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아직 어린 그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애써 부인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막연한 질투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더구나 방백린의 운령에 대한 배려는 확실히 남의 눈에 보기에도 남달랐다.

“그럴지도 몰라요. 운령을 보는 당신의 눈빛은 여자만이 알 수 있어요.”

유항이 나직이 탄식을 터트리며 말하자 방백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유항의 표정은 농이 아닌 진심이었다.

“원 사람도… 쓸데없는 소리는….”

방백린은 그냥 넘기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유항의 눈길은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진지했다.

“내가 운령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것은 남녀 간의 감정이 아니야. 아끼고 싶은 동생 같은 마음이지. 더구나 운령은 대사(大事)에 필요한 아이야. 어차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해.”

하지만 유항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라면 어느 한 순간 사소한 계기로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는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다.

“헌이와 맺어주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유항은 대놓고 부인할 수 없었다. 방백린이 저렇게 말하는데 아니라고 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예감일 뿐이었다.

“알았어요. 그만 하세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소첩이 잘못 말했나 봐요.”

잠시 두 사람 간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방백린 역시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큰일을 앞두어도 여자의 천성은 고치지 못한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듯 질투는 여자의 본성이다.

슬그머니 방백린이 유항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항의 나긋한 몸이 못이기는 척 방백린의 옆으로 다가들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겠지…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일이 이제 시작인데….”

달래듯 말하자 유항이 배시시 웃었다.

“당신 아버님께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요?”

“아직은….”

“이쪽 사정을 모르고 계시지는 않으실 텐데요.”

“방도가 서 계시겠지. 아니면 내가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고….”

그러고 보면 이미 모든 것은 결정이 된 상태였다. 지금 그가 움직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반전을 꾀하면 그만이었다. 연락이 없다는 것은 이미 세운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헌데 유항의 입에서 아버님이라고 지칭되는 인물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방백린의 부친은 농부이자 백련교도로 알려진 방춘(方椿)이란 자였다. 대명 초기 관부에서 백련교도들을 색출해낼 때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럼에도 방백린의 아버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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