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02회

등록 2005.11.09 08:21수정 2005.11.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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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도가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과거와 같이 복수를 위하여 왕야의 목숨을 걸고 승부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광노제란 인물은 고개를 돌려 왕야와 담천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르침이란 말은 당치도 않소. 영주는 이미 만검의 요체를 깨달았소. 노납은 만검을 당하지 못하오.”


정중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광노제라 불린 인물은 분명 승(僧)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노납이라 칭했다. 그것은 겉모습은 승이 아니라도 자신은 승이란 의미. 그때였다. 초옥의 문이 열리며 덩치가 매우 큰 인물이 들어서며 불호가 실내를 울렸다.

“아미타불…! 오랜만이오. 담시주.”

들어오는 노승을 보는 순간 담천의는 정말 놀랐다. 이 분은 여기에 왜 와 있는 것인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 간 무량하셨습니까? 뵙고 싶었습니다.”

소림의 광무선사였다. 자신에게 화두를 던져 준 정신적인 스승. 날려고 애쓰는 새끼독수리에게 하늘을 휘젓고 다닐 수 있도록 날개에 힘을 실어 준 인물이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 광무선사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광법사형(光法師兄) 대신 노납이 영주의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소? 허허….”

광노제란 인물이 광무선사의 사형이었던 광법(光法)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문을 떠나 균대위에 몸을 담아야 했던 광자배(光字輩) 광법(光法)과 광정(光正) 중 광법. 광법이 비원의 원주 곁에서 호위를 맡게 된 것도 담명 장군의 배려였으니 사실 담천의와 아주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감히….”

사부에 대한 반감과 혼란스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고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느꼈기에 가르침을 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광무선사의 사형임을 안 다음에야 고집 피울 수 없는 일. 담천의는 정중하게 광노제라 불리웠던 광법선사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듯 포권을 취해보이고는 다시 광무선사를 바라보았다.

부리부리한 호목에서 쏟아지는 정광은 한층 더 맑고 깊었다. 아마 한 번 들어선 깨달음의 길은 그를 더욱 심오한 경지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그는 한편으로 내심 씁쓸했다.

이 또한 사부의 의도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사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깨달음인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란 말이 무공에 한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 역시 끝없는 연기(緣起)의 망 안에서 존재하고 끊임없이 연(緣)을 만들어 가며,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죽는다 해도 그 연기의 망은 자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엉키게 되는 것이다. 이미 십수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의 연은 지금 살아있는 담천의를 그 망 안에 가두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담천의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든 실타래를 끊어 버리고 홀로 있고 싶었다. 결국 지금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의지는 곧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훌쩍 이곳을 떠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돌연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도대체 저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그의 급작스런 돌변에 놀란 듯 사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가의 근육을 씰룩거렸다. 처음에는 약간 놀란 듯이 그리고 나중에는 서서히 미소로 번져갔는데 입가에서 시작된 미소는 그의 눈과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전하라는 호칭보다는 확실히 사부라는 말이 듣기 좋구나. 이 사부는….”

이제 솔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 아비를 닮아 고지식한 이 녀석은 젊음이 가지는 경솔함이란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 경솔함으로 대사를 그르칠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보여주는 것이 아 아이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 생각했다.

“이 사부를 도와다오.”

나라를 위해서라든가, 네 부친의 복수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따위의 그럴듯한 미사여귀는 달지 않았다. 그것이 차라리 인간적이었다.

“균대위를 힘을 얻기 위함입니까?”

따지듯 물었다.

“너와 균대위 둘 다다.”

“알려주시겠습니까?”

“모두 다… 이제 너에게 숨길 이유도, 그럴 마음이 없다.”

갑자기 담천의는 허기를 느꼈다. 속이 텅 비어 허전한 것 같았다. 이러한 허기는 너무나 오랜 만에 느껴보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정말 속이 비어 그런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주왕(周王) 주숙(朱橚).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제5자(第五子)이자 현 영락제(永樂帝)의 동생.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신중한 인물로 알려짐. 정사(政事)에 간여치 아니하고 대학유와 교류하길 좋아함. 서체에 능하고 특히 작물 재배나 식물에 대해 관심이 높은 인물로 알려짐.

영락 사년에 <구황본초(救荒本草)>를 편찬한 적이 있는 있을 정도로 작물재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임.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배제되었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 주숙이 비원의 원주가 확실함. 현재 금릉 외곽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되었음. 담천의 역시 주숙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종리추가 이끄는 인원이 그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음. 담천의를 제거하고 곧 바로 주숙을 노리고자 함. 추후 결과를 보고하겠음.


“예상 밖이군.”

방백린은 전서를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비원의 원주가 누군지 내력을 캐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동안의 조사에서 원주일 것이라 예상했던 인물들을 조사했지만 번번이 빗나갔던 이유가 있었다.

주숙은 학자였고, 매우 조용한 성품이었다. 다른 왕들과는 달리 정사(政事)에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사병을 키우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직접 땅을 일구고 채소나 작물을 기르고 연구하는 인물이었다.

기근(饑饉)이 들거나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구황작물(救荒作物)을 연구하여 구황본초(救荒本草) 2권을 편찬하기도 했다. 구황본초는 400여종의 작물을 그림까지 그려 만든 것으로 실질적으로 농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음식으로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요리법도 기술하여 실제 주식(主食)을 대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연구서다.

후에 시호(諡號)는 정(定), 주정왕(周定王)에 추증(追贈)된 인물로 다른 왕들과는 달리 그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왕(王)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주유돈(朱有燉) 역시 사후 주헌왕(周憲王)으로 봉해진 인물.

탁자 주위에 걸린 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는 둥근 등은 여러 개가 걸려 있었는데 유독 탁자 주위에 있는 네 개의 등만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닫아 놓은 상태라 바람이 들어올 리 없었다. 헌데도 등은 일정한 원을 그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군요. 오왕야(五王爺)라면 충분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는데….”

유항(柔姮)의 말에 방백린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주왕을 조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방백린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금 그의 뇌리 속에는 비원의 원주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있었다.

왜 전월헌은 직접 종리추와 함께 담천의를 노리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리 균대위의 인물들과 떨어져서 홀로 움직이고 있다하지만 종리추 만으로는 버거울 것이었다. 전월헌이 너무 사영천의 힘을 과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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