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사람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행동한다. 그러다보면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할 일을 주춤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
“진방주께서 노부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를 드리오. 노부는 진방주의 말씀대로 방법을 찾아보겠소. 허나 적들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기습해 올 것이오. 군웅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진영을 갖출 틈을 주지 않으려 할 것이오.”
진대관은 역시 구효기란 인물이 가진 위명이 허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우 노회하고 사고의 범위도 넓었다. 좌중을 이끌어가는 설득력도 갖춘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 말을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 현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오. 빨리 군웅들을 안정시키고 진영을 갖추어야 하오. 이런 시기에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자살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소.”
적들은 또 다시 기회를 노리며 기습해 올 것이었다. 진영을 짜고 전략과 전술을 의논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당장 해가 떨어지고 나면 어둠이 찾아올 것이고, 분명 적들은 그 어둠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적들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겠소?”
황보장성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구효기가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진영을 새로 짜는 것은 적들에게 기회만 주는 꼴이오. 따라서 삼진으로 구성한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방어에 치중한 진영을 갖추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오.”
이미 구효기는 이런 와중에서도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현재는 그가 제마척사맹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좌중은 일말의 기대를 가지며 구효기를 바라보았다.
“삼재진을 변형한 삼첨진(三尖陣) 형태를 취하겠소. 일진이 중군(中軍)이 되어 전방을 방어하고 이진은 좌측. 삼진은 우측을 맞되, 상대가 전면전을 생각하고 돌진해 올 때는 학익진(鶴翼陣)의 형태로 변형될 것이오. 이진과 삼진은 좌우 날개를 펼쳐야 하므로 기동력이 있도록 준비하셔야 하오.”
마치 세 개의 날을 가진 창의 끝과 같은 형태의 진영이 삼첨진이다. 배후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공격이 아닌 절대적으로 수비에 치중한 진이기는 하지만 전면만큼은 무엇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더구나 유사시에 학익진 형태로 변형하여 중군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는 적들을 포위할 수 있는 형태였다.
지형적으로 배후는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다수의 적이 배후로 치고 들어올 염려는 없었다. 적은 수로 경계만 한다면 배후는 그리 염려되지 않을 터이니 내를 건너 적들이 포진해 있는 현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진이었다.
“수비만 하고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질 수 있소.”
황보장성이 답답한 듯 말했다. 지금 구효기가 말한 삼첨진은 수비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기는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질 것은 당연했다. 구효기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들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지금 시급한 것은 진영을 갖추기 위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내일 일은 내일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소. 지금 이 순간 적들이 다시 기습을 해온다면 우리는 준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할 것이오.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빨리 진영을 갖추는 일이오.”
그 말에 철혈보의 독고문과 무당의 청허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효기가 지금 원하는 바가 무언지 알았다.
“무량수불.....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좋은 의견이 없다면 노도는 구거사의 말씀에 따르겠소.”
무당의 위세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더구나 철혈보의 독고문 역시 청허자와 같은 의견임을 행동으로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의견이 있다 해도 선뜻 말할 사람은 없다. 좌중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임시천막을 나서는 수뇌들의 뒤를 따라 나서는 구효기의 얼굴에는 더욱 암울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다. 일단 임시조치를 하기는 했지만 황보장성의 말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더구나 어떠한 변수가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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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모두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모용수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도복 차림의 인물이 앉아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이어서 태산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 같았다. 모용수가 단지 모용가의 식솔이라고 소개는 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담오라버니는 보시지 못하셨나요?”
남궁산산 역시 자리에 앉으며 되물었다.
“담형도 오기로 했느냐?”
“약간 늦을지 모르겠다며 오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떠나라고 하더군요. 아직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으니 기다려 보죠.”
“아무렴..... 제마척사맹의 맹주이신데 기다리는 것만 해도 영광스럽지. 하하.....”
모용수는 힐끗 자신의 옆에 앉은 인물을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려 남궁산산을 보며 밝게 웃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도복 차림의 사내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기다린다는 말에 불쑥 입을 열었다.
“모용공자.... 천마곡에 변고가 생긴 것 같소.”
“무슨 변고를 말함이오?”
모용가의 식솔이라고 소개는 했으나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으로 보아 가정(家丁)이나 호위무사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무림세가는 떠돌이 무사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여 세(勢)를 불리기도 하였다. 무공수위가 높을수록 빈객으로 대접받게 되는데 묘용수의 말투로 보아 그런 류의 인물인 것 같았다.
“반 시진 전 모용공자를 기다리다가 모용가주의 전서를 받았는데 저들이 천마곡의 입구를 붕괴시켰다고 하오.”
도복차림의 사내와 모용수가 만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림세가에 식객으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로 보였다.
“입구를 붕괴시켰다면 천마곡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 아니오?”
“이미 모용가주께서는 물론 일부 군웅들은 천마곡에 진입했다고 하오. 맹의 전력이 나뉘어 진 것 같소.”
모용수의 얼굴이 굳어들었다.
“큰일이군. 놈들의 잔꾀에 당한 것 같아.”
모용수는 근심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력을 분산시켰다면 그 의도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구양오라버니도 천마곡 안으로 진입했을까요?”
남궁산산 역시 근심이 서린 목소리였다.
“당연하겠지. 구양백부님을 대신해 구양가를 이끄는 분이 대형이 아니시냐? 아버님이 움직이셨다면 같이 움직이기로 한 무림세가는 모두 진입했다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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