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13회

등록 2005.11.24 08:19수정 2005.11.2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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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의 당연하다는 말에 남궁산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렇다면 남궁가에서 파견한 숙부님과 남궁가의 식솔들도 지금 천마곡 안에 있을 터였다.

“누님…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있을 일이 아닌 것 같소.”


남궁산산의 곁에 앉아있던 남궁정천이 검미를 치켜뜨며 당장이라도 일어날 기색을 보였다. 남궁산산이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너는 또 서두르는구나. 지금 당장 떠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엄한 꾸지람이었다. 남궁정천은 움찔했다. 얼굴에는 불만스런 표정이 떠올랐지만 남궁산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지금 급히 간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사태를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쟁쟁한 인물들이 제마척사맹을 구성하고 있다. 간다 해도 자신의 생각조차 한 마디 할 수 없는 처지다.

모용수는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남궁산산과 남궁정천을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니야… 남궁아우 말이 틀렸다고만 할 수 없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린다고 될 일은 아니야.”

모용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남궁정천은 불만스런 기색을 지우며 남궁산산을 흘낏 보았다. 거 보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단은 산산 네가 먼저 가 보는 것이 어떠냐? 도착하면 즉시 상황을 알아보고 연락을 다오. 나는 이곳에서 담형을 기다리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해 보마. 아무래도 아버님께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니만큼 빠르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남궁산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더구나 마음이 조급해져서 한가로이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남궁산산이 고개를 돌려 황보옥(皇甫鈺)을 바라보았다.


“옥매. 바삐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쉬지 못하고 가야할 것 같구나.”

황보옥은 피곤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강호 초행이랄 수 있는 그녀로서는 사흘간의 강행군이 벅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죠. 언니… 걱정 마세요. 짐이 되지는 않을게요. 저 역시 아버님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구요.”

황보옥은 배시시 웃었다. 황보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그녀로서는 고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보던 남궁산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급해도 안 되겠다.”

황보옥을 보니 밤길을 타고 가려면 무리가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천마곡으로 가려면 산길을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모용오라버니… 어차피 늦었으니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할까 해요.”

모용수 역시 이미 황보옥을 본 터였다. 아무리 남궁정천이 있다고는 하나 여자들이 밤길을 재촉해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는 것이 좋겠다. 일단 식사나 하지.”

그러자 남궁산산이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오다가 간단히 요기는 했어요. 내일 새벽에 출발하려면 일찍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남궁산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정천과 황보옥이 따라 일어섰다. 남궁산산은 모용수와 도복차림의 사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객실로 향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도복차림의 사내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군.”

그 말에 모용수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일엽(一葉) 형도 여자에 흥미가 있으시오? 일봉이화(一蜂二花)란 말이 괜히 붙었겠소?”

일봉이화 중 일화가 바로 황보옥. 그러나 일엽이라 불린 인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보옥이 아니라 남궁산산이란 여인 말이오. 몸에 배인 귀품(貴品)은 아무나 갖게 되는 것이 아니오.”

그 말에 모용수는 마음속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뜻은 이미 면사 안으로 남궁산산의 얼굴을 보았다는 의미였다. 대단한 고수라 들었지만 면사를 투시해 그 안을 볼 정도로 안광이 뛰어난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용수는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일엽이란 인물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 일엽(一葉)이라는 명호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

음낙성(陰樂晟)은 매우 영리한 두뇌를 가진 자였다. 어렸을 적에는 글줄 깨나 읽었고, 손재주가 많아 기관(機關)이나 토목지학 방면에서는 인정을 받은 터였다. 하지만 그는 게을렀다. 천성이 그런지 아니면 희망이 없는 삶을 포기해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허나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역적으로 몰린 부친으로 인해 집안 전체가 참화를 당한 후부터 게을러졌다고 하는 것을 보니 천성이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무공을 익혔지만 보잘 것 없었고, 그나마 게으름을 피면서도 먹고 자는데 걱정이 없는 것은 연동(蓮洞)에 기관을 설치하는데 일조를 하고, 일부분이지만 관리를 하고 있는 덕택이었다.

그는 너무 게을러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자신이 맡은 기관을 점검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연동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외부 인물들이 침입할 일도 없었으니 기관을 작동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요사이 부쩍 연동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일이 잦아지고, 곡주로부터 맡고 있는 기관에 대해 철저하게 점검하라는 지시했다는 전갈을 받자 하는 수 없이, 그것도 사흘 만에 겨우 한 번 돌아보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왜 이리 변했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관에 이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관의 작동장치가 달라져 있었다. 연동 전체를 통재할 수 있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방이 있었지만, 안전을 위해 따로 일정 범위마다 작동할 수 있는 별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

헌데 자신이 맡은 범위 내의 기관 작동 장치가 변경되어 있었던 것이다. 음낙성은 기관 장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자신이 설치한 기관 장치를 누군가가 변경시켜 놓았다면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함부로 작동시키다가는 자신마저 기관장치에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누가 장난을 쳤지?)

그는 조심스럽게 기관 장치를 조사하다가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별도로 만들어진 이 기관 장치는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변경되어 있었다. 대신 중앙부의 기관장치에 의해 작동되도록 해 놓은 것이다.

이런 일은 곡주의 명이 없으면 변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곡주의 명이 떨어졌다면 분명 자신에게도 전달이 되었을 터였다. 아무리 자신이 게으르다 해도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그는 급히 기관 전체를 작동시킬 수 있는 중앙 기관 장치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곡주의 허락 없이 기관을 변경시켰다면 즉시 곡주께 보고해야 했다. 게으름은 용서가 되지만 태만은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변경을 시켜 놓았다면 일단 곡주에게 보고부터 해야 했다.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두 번째 해야 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왜냐하면 변경된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태만이라고 생각될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실수를 자신의 입으로 보고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는 또 다른 실수를 낳는다.

(제 75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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