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평가 논쟁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이유

전교조 이수일 위원장의 사퇴 소식을 듣고

등록 2005.11.30 10:34수정 2005.12.0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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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이수일 위원장이 전격 사퇴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 일요일 밤이었다. 생일을 맞은 제자를 위해 생일 축하시를 써줄 생각으로 컴퓨터를 켰다가 전혀 뜻밖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것이었다.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없는 눈곱을 떼고 다시 보아도 처음 본 내용이 분명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머리 속에 대강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역시 교원평가가 문제였다. 삭발한 이수일 위원장의 초췌한 모습에서 진한 외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갑자기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 슬픔의 감정은 그동안 교원평가 논쟁을 지켜보면서 줄곧 느껴온 감정이기도 했다.

위원장의 사퇴가 발표되기 이틀 전, 나는 어느 식당에서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전교조 조합원인 후배 교사였고, 한 사람은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선배 시인이었다. 두 사람 다 내가 오랫동안 존경하고 신뢰해온 사람들이었다. 식사 도중에 후배 교사는 느닷없이 선배 시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배님은 교원평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지만 선배 시인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교원평가 받아야지요. 물론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평가 받는 것이 달갑지는 않겠지만.”

선배 시인의 거침없는 그 대답도 나를 놀라게 했지만 내가 더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후배 교사가 선배 시인의 말에 동조하며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교원평가 받아야합니다. 아니, 받고 싶습니다.”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시민운동을 하는 선배 시인이야 학교 사정을 잘 모르는 학부형의 입장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전교조 조합원이요, 한때는 조직의 책임을 맡았던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한 술을 더 뜨는 것이 아닌가.


“전 학생들에게도 교원평가 하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알 것 아닙니까? 누가 좋은 교사고 누가 형편없는 교사인지. 왜 우리 전교조가 국민들의 원성을 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그때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배 시인과 나를 번갈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우리 교사들이 평가받는 것을 꺼려한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전교조 조합원 중에는 교원평가 받자고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평가를 받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상이 드러날 게 아닙니까? 누가 수업을 잘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인지.”

그는 어떤 주장을 했다기보다는 울분의 감정을 토로한 한 셈이었다. 물론, 국민 대다수가 교원평가에 대해서 곡해하고 있거나 지나친 기대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극심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국민이나 정부와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그의 속내가 읽혀지기도 했다.

‘교원평가’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어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갑자기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교원평가에 대한 나의 솔직한 견해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할 것 같다.

“그거 하나마나에요. 결국은 국가 예산낭비죠 뭐.”

듣는 이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망언 내지는 불온한 선동으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20년 가까이 우리 교육현장의 실체적 진실을 목도해온 나로서는 가장 정직한 대답을 한 셈이다. 형식적인 수업평가는 연구수업이나 동료장학이란 이름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 물론 그런 전시용 수업이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은 학교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연구수업이나 동료장학이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입시교육 때문이다.

보여주기 식의 일회성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종전의 수업 형태로 돌아가고 만다. 그것이 게으르거나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교사가 저지르는 직무유기가 아니라 대다수 교사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이제 그것은 관행도 아니다. 수능점수를 높여서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어버린 학교에서는 더 이상 거론할 여지가 없는 하나의 진리(?)로 굳어진 지 오래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교원평가가 마치 도탄에 빠진 우리 교육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이를 반대하는 전교조가 나라의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 되어야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실체적 진실이야 어떻든 전교조에 대한 국민의 정서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위원장으로서도 고심이 되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본다면 교원평가를 놓고 정부와 교섭 중이던 이수일 전교조 위원장이 전격 사퇴를 선언하게 된 것은 전교조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부가 주도한 교원평가의 거품이 가져온 결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전교조라면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그 이름만으로도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집단들이 가세하여 교원평가 논쟁은 생산성이 없는 감정대립의 장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교원평가 논쟁이 나를 슬프게 하는 첫째 이유이다.

1년간 교장, 교감, 동료교사 간의 한두 차례의 평가와 학생, 학부형의 설문조사로 어떻게 교원을 평가하겠다는 것인지, 정부의 이러한 발상도 문제지만 과연 어떤 수업이 좋은 수업인지 아직까지 합의된 바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좋은 수업에 대한 잣대가 아직 없다.

한국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기 일쑤인데 그 가운데 입시교육에 대한 비판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돌아서면 그뿐이다. 이를 고치려는 실천적 의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학교 현장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 싶어 하는 교사들마저 입시학원과 다를 바 없는 거대한 점수 경쟁의 수레바퀴 속에서는 문제풀이 교사로 전락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교사들이 어떤 수업이 좋은 수업인지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당연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리고 학교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훌륭한 교사들이 있기도 하다. 그들이 학교 현장에서 오히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교원평가가 실시되면 이런 입시교육의 병폐가 사라질까?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실효성 없는 ‘하나마나한’ 교원평가가 이미 뿌리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학교 현장의 입시교육을 회생시키거나 반전시킬 힘이 있을 리도 없겠지만 교원평가가 하나의 악재로 작용하여 오히려 입시교육을 강화하는 쪽으로 돌아설 승산도 크다.

이러한 예측은 교원평가가 정부의 사교육비 절감대책의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타당성을 지닌다 하겠다. 사교육비란 쉽게 말하면 ‘학원수강비’를 의미한다. 그리고 학원은 교육이 아닌 점수를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교육을 담당해야하는 학교와 점수가 중요한 학원을 같은 부류로 혼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학교도 이미 교육보다는 점수가 중요한 입시교육의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이를 쇄신하고자 하는 노력마저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육의 미래가 너무 어둡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언제까지 입시위주 교육을 한탄하며 방어적인 자세로만 일관할 것인가? 입시교육이 심화되는 과정 속에 우리 교사들이 한몫 한 것도 사실인데 모처럼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이때에 교원평가를 하나의 단초로 삼아 좋은 수업의 모형을 모색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망국의 입시교육의 묵은 틀을 깨뜨릴 수도 있는 묘안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 자신에게 던져본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글쎄올시다”이다. 이런 부정도 긍정도 아닌 답이 나오는 이유는 꽤 복잡하다. 우선 학교 현장부터 점검해보기로 하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모색하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논의구조가 필요하다. 부끄럽게도 선진국 도약을 눈앞에 둔 우리나라의 학교 현장에는 그런 것이 없다.

교사들은 교무회의에서 교장이나 교감, 혹은 부장교사들이 전달하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가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전달해주면 그 뿐이다. 거기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려는 교사는 이른바 ‘벌떡 교사’로 지목받기 십상이다. 학생들의 사정은 더 기막히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들어 있는 자치활동시간은 자율학습시간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올곧은 교육관을 가진 좋은 담임을 만나 자치활동 시간이 보장되다고 해도 민주적인 회의 절차에 익숙하지 못한 학생들은 그 시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랫동안 점수 기계로만 살아온 까닭이다. 어디 그뿐인가. 학생회가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학생회 사무실이 없는 학교가 부지기수인 사정까지 말하자면 울화가 치밀어 호흡만 가빠진다.

학부모회도 사정도 마찬가지다. 엄연한 교육 3주체 중 하나인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하는 일이 고작 교사들 뒷바라지다. 가끔 학교는 자기 자식 챙기기에만 급급한 열렬 학부모들의 치맛바람 경연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교육에 대한 참뜻을 가진 학부모들의 설자리가 마땅치 않다.

전교조는 교사회, 학생회, 학부모회의 법제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한 학교자치의 건강한 틀 속에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리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원평가도 그런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참여정부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국민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한다.

사립학교법 개정도 그렇다. 학교가 비리에 휩싸여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온전한 교육을 기대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교원평가 국면을 맞이하여 제철을 만난듯이 찧고 까불고 있다. 그들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교원평가 아니라 전교조 때려잡기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육을 위해 평가가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평가를 위해 교육을 하는 주객이 전도된 교육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부주도의 졸속적인 교원평가는 이런 입시교육의 병폐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부추길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교원평가 논쟁이 나를 슬프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사랑이 크면 슬픔도 깊어지는 법이니 이수일 위원장이 체감한 슬픔은 더 크고 깊었으리라. 이제 곧 학교로 돌아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게될 그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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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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