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잘못을 했는지 귀엽게 생긴 여학생 네 명이 차가운 교무실 복도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장난기가 동한 저는 그들 곁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말이야, 만약 한 달에 3백억을 벌게 된다면 그 돈으로 뭐할래?”
“옷 사요.”
느닷없이 던진 질문인데도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대답이 쉽게 나왔습니다. 그만큼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겠지요. 저는 그 옆의 아이에게 고개를 조금 내밀고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은 좀 색달랐습니다.
“전 경락 마사지 할래요.”
“경락 마사지가 뭔데?”
“전신 마사지 하는 것하고 비슷해요.”
“그거 돈 얼마 안 들잖아. 남은 돈으로 뭐하고 싶어?”
“집 사요. 그리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그래도 돈이 남을 텐데?”
“그럼 세계일주나 하지요 뭐.”
“세계일주도 1억이면 충분할 걸.”
그렇게 말하며 싱긋이 웃어보이자 아이도 따라서 싱긋이 웃어보였습니다. 우린 금세 친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다음 달에 번 3백억으로는 뭐할래?”
“또 옷 사요.”
“또 경락마사지해요.”
“또 세계일주해요.”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아이들은 불과 1분이 못 되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지요.
“애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비싼 옷을 사 입는다고 해도 3백억이면 평생 입을 옷을 사고도 남을 거야. 경락마사지도 그렇고. 세계일주를 마찬가지지. 그런 것쯤은 한 달 벌이로 끝나는 거지. 그래, 넉넉잡아 일 년 동안 번 3천억으로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옷도 사고 경락마사지도 하고 세계일주도 했다고 하자. 그런 그 다음에 번 3백억으로는 뭐할래?”
한참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로의 눈만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이 조금은 안쓰러워보였습니다. 잠시 후 한 아이가 묘안이 떠올랐는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 사요.”
“땅은 왜 사는데? 돈 벌려고 사는 거잖아. 매달 3백억이 나오는데 뭐하려고 돈을 벌어. 그렇지 않아도 너 그 돈 어디에 쓸 줄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또 다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돈이 있어도 쓸 데가 없다니! 아이들은 그것이 믿기지 않은 듯 입을 열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는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침묵을 깼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돈을 어디다 쓰실 건데요?”
“난, 쓸데가 너무 많지. 우선 말이야. 이곳 순천에 청소년 전용 문화센터를 하나 지어주고 싶어. 한 3백억쯤 들이면 쓸 만할 거야. 너희들 방과 후에 어디 갈 만한 데가 없잖아. 그곳에서 운동이나 수영도 할 수 있고 춤도 배울 수 있고, 물론 책도 볼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지. 그리고 영화도 볼 수 있고. 소년소녀 가장들은 아예 그곳에서 잠도 잘 수 있게 방도 꾸며주고.”
“그럼 그 다음달에 번 돈은요?”
“여수에도 그런 청소년 문화센터를 하나 지어주면 되지. 다음 달에는 전주에, 그 다음 달에는 대전에. 그리고 대학에는 학생회 사무실도 있고 동아리 방도 많은데 중학교나 고등학교에는 그런 것이 없잖아.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중학교 고등학교에 학생회 사무실 만들어주고 동아리 방 만들어주려면 돈이 꽤 들 거야."
아이들은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는 듯 조금은 감탄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교사에게는 이런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요. 저는 신이 나서 교무실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마구 떠들어 댔습니다.
“여기 이 볼펜이 과자라고 하자. 그런데 이게 딱 하나 밖에 없는 거야. 네 엄마가 생각할 때, 그거 네가 먹는 게 더 맛있어, 엄마가 먹는 게 더 맛있어?”
“제가 먹는 것이 더 맛있어요.”
“왜 그래?”
“절 사랑하시니까요.”
“그렇지? 엄마가 널 사랑하니까 엄마 자신이 과자를 잡수시는 것보다 네가 과자를 먹는 것이 더 맛있겠지? 난 청소년들을 사랑해. 그래서 청소년 문화센터를 지어주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것을 보면 내가 행복한 거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밥을 하루에 열다섯씩 먹을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오히려 건강이 나빠져서 더욱 불행해지겠지.
지금도 북한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어린이들이 많아. 만약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처럼 맛이 있을 거야. 그럼 행복도 그만큼 커지는 거지. 물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은 아니야. 그건 순수하지 못하지. 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도 그만큼 커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예.”
그런 눈으로 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금 전과는 아이들의 눈빛이 한껏 달라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날 아이들은 교무실 복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우연히 지나치다 부족한 제가 그들의 선생이 되었던 것이 기쁘고 행복할 뿐입니다.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행복의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고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부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다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실상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공부의 노예가 되고 돈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들 대부분은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점수 때문에 친구도 적이 되는 곳이 아닌, 이런 행복의 역설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학교가 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환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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