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24회

등록 2005.12.09 08:26수정 2005.12.0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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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에요? 당신은 아주 무례하군요.”

야심한 시각이었다. 뾰쪽한 목소리였지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여인은 급히 만든 것으로 보이는 낮은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아직 옷을 벗지 않은 상황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임시로 만든 천막이라고 하지만 남정네가 이리도 늦은 시각에 기척도 없이 불쑥 여자의 거처로 들어올 법한 일인가요? 남들이 알면 당신을 치한으로 여길 거예요.”

여인은 면사를 쓰고 있었는데 매우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만 빼꼼이 보이는 면사가 물결치듯 떨렸다.

“나는.... 분이나 덕지덕지 처바르고 사내의 호기심이나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는 계집 따위에게는 흥미가 없어.”

여인의 처소로 들어 온 인물은 구양휘였다. 그의 모습은 현저하게 변해 있었다. 꺼칠한 수염 때문인지 몰라도 약간 마른 것 같기도 했고, 헝클어진 머리칼과 핏방울 자국이 역력한 의복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흉폭한 한 마리 맹수를 연상케 했다.

움푹 꺼진 그의 두 눈에서는 전에 볼 수 없는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고, 전신에서도 잘 갈아놓은 칼날과 같은 예리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마 동생의 죽음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는지 몰랐다.


“더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치한으로 여기든 색마로 여기든 관심이 없어. 너도 들었을 거야. 나는 이곳에 올 때 땅이 울릴 정도로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고 걸었어. 아마 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걸?”

“당... 당신... 정말....?”


구양휘는 덜렁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자의 마음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 정작 욕이라도 보이려 들어왔다면 큰일이겠지만, 이렇듯 자신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는 식의 태도에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 이곳은 구양가의 영역이야. 적과 대치되어 있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본가 영역 안에 있는 사람은 여하를 막론하고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너도 알거야.”

“.......!”

“자... 이제 솔직히 말해봐. 무슨 목적으로 우리 일행에 끼어들었지? 아주 신비하고 고고한 척 하면서 면사까지 쓰고 말이야? 도대체 너는 누구지?”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양휘는 아예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전과는 달리 칼날이 서 있는 듯한 모습의 구양휘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가 적에게 보여준 광폭하고 무자비한 모습은 적들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까지 서늘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여자의 기세는 한 풀 꺾인 듯 했다. 구양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몽화(夢花)라고...? 그래 강북의 일봉이화(一蜂二花) 중 하나라고? 네가 설사 몽화라 해도 몽화가 도대체 누군데? 몽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나? 몽화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던가? 누가 붙였는지도 모를 이름 하나만 덜렁 갔다대고는 얼렁뚱땅 넘어가 달라고?”

몽화.... 그녀는 몽화였다.

“이미 팽가의 가주께서 나에 대해서는 믿음을 주지 않았나요?”

몽화는 천마곡으로 진입하기 며칠 전 구양휘 일행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하북 팽가의 가주인 팽염(彭焰)의 서신을 가져온 사람은 팽가의 가솔들을 이끌고 이번 제마척사맹에 합류한 오호수조(五虎垂釣) 팽륜(彭崙)이었다.

팽륜은 거친 팽가의 인물답지 않게 유유자적하고 낚시를 즐겨하는 인물이었는데 팽가를 대표해 제마척사맹에 온 것은 사실 의외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구양휘에게 몽화와 함께 팽악 두 사람을 맡길 테니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네가 어떻게 팽숙부님을 구워삶았는지 나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이곳에 있는 이상은 나는 반드시 네가 누군지 알아야겠어. 내가 너를 확인하지 않고 구양가의 식솔이라고 말해 이곳에 데리고 들어온 것은 팽악이라도 너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도 너를 모르고 있더군.”

“나는 당신들을 도우러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빠져갔다.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돌리려 했지만 구양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게 더 문제였어. 네가 있는 듯 없는 듯 했다면 나 역시 네 존재를 잊어버렸겠지. 하지만 난생 처음 보는 계집이 상대가 언제 어디로 기습해 올지, 그 인원이나 전력이 어느 정도 될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에 따른 대응전략까지도 모두 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어.”

“그게 잘못된 일인가요?”

“잘못되었지. 아주 크게 잘못된 일이야.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지?”

“기껏 도움을 주었더니 당신은 나를 의심하고 있군요.”

“적과 내통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이지.”

구양휘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몽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요. 상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에요.”

그 말을 들은 구양휘의 얼굴에 흐릿한 비웃음이 떠오른 듯 했다.

“그 말은 설마 네가 만박거사보다 더 똑똑하다고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고 있는 소리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아주 교묘하게 화장하듯 말이야......”

구양휘의 독설은 마주 앉아 듣기에 너무 거북했다. 하지만 몽화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듯 했다.

“따질 수야 없지만 당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굳이 따지라면 지금 현재만큼은 내가 구거사보다 나을 거예요. 지금 구거사는 당황하고 있어요. 막중한 책임이 두 어깨를 누르는 가운데 여러 사람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구양휘는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말은 의외였다. 이 중원에 스스로 만박거사보다 더 뛰어난 지모를 가졌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어 농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미가 당겼다.

만박거사는 구양휘의 의숙이다. 구양휘 역시 요즘 만박거사에 대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전과 같지 않게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화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거사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네 말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네가 더 영리하다고 믿을만한 사실은 아직 아무 것도 없어.”

몽화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갈등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구양휘의 성격으로 보아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반드시 확인을 하기 위해서다. 절대 그냥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구양휘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예전에 나를 만난 적이 세 번 있어요.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죠.”

“그렇다면 나는 바보거나 천지 중 하나이겠군.”

구양휘는 냉소를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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