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장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번에는 일엽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나타난 사내를 보는 순간 처음에는 놀라는 듯 하더니 의혹스런 기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추형(萩兄).... 여기는 어떻게...?”
도저히 모른 척 할 수는 없던 모양이었다.
“왜...?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이상한가?”
나타난 인물은 바로 추학(萩學)이었다. 담천의와 오위의 수장들이 유곡을 찾기 위해 구화산(九華山) 여음곡(女陰谷)으로 들어갈 때 음양이괴(陰陽二怪)와 같이 있었으며, 황원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추학은 일엽이 아는 척 하자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변을 당했다고 들었소.”
일엽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인물이 공교롭게도 이곳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 볼 일은 아니었다.
“게으른 것과 삼십육계는 내 특기이네. 그건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추학이 자신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만큼 특별히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추학은 저 삐딱한 성격 때문에 상대하기 귀찮은 자였다. 그로서는 항상 꺼려지는 상대이기도 했다.
“이곳은 추형이 낄 자리가 아니오.”
그 말에 추학의 얼굴에 노기와 함께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 역시 냉랭해졌다.
“호.... 높으신 양반들만 앉는 자리란 말인가? 보잘것없는 나 같은 인간은 끼지도 못한다는 말이군.”
“그런 뜻이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라면...? 일면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도 모호한 저 사람은 이 자리에 합석을 시키고, 그래도 서로 안면이 있는 나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추학은 비꼬듯 말을 하면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사내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추학이 나타났던 말건 간에 이쪽에는 전혀 상관을 하지 않고 탁자에 놓인 음식을 먹느라 바쁜 것 같았다. 일엽 역시 스치듯 그 사내를 보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추형을 무시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추형이 더 잘 알잖소?”
“자네는 언제나 자네의 진심을 감추는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자네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만나는 것조차 꺼려했다는 사실이지. 안 그런가?”
추학이 대놓고 따지듯 말하자 일엽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는 사이인 것은 분명한데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일엽형이 아시는 분이라면 그냥 합석하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일엽이 곤란해 하는 것 같자 모용수가 나섰다. 어차피 이 자리는 음식을 마구 먹고 있는 사내가 나타난 그 때부터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 더 낀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모용수가 자신의 술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추학에게 잔을 내밀었다.
“술 한 잔 하시려오?”
“역시 세가의 후손은 다르군.”
추학은 모용수를 보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어 보였는데 그러한 웃음은 그의 습관인 것 같았다. 더구나 그는 모용수의 잔을 건네받지 않고, 오히려 옆에 놓여있는 빈 찻잔을 들었다.
“나는 예전부터 술을 술잔에 따라 마셔본 적이 없소. 항상 웃어른들 눈치를 보느라 찻잔에 술을 따라 마셨단 말이오. 그것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인지도 모르지만......”
추학이 일그러진 미소와 자괴적인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밀자 모용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술을 따라 주었다. 인간들 중에는 언제나 패배감이나 자괴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더구나 알량한 자존심이 세상사는 유일한 목적인 양 자신은 스스로를 비하하지만 남이 자신을 비하하려 들면 절대 용서를 하지 않는다. 대화 역시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비뚤어진 대답이 나오거나, 남의 말꼬리나 잡아 꼬치꼬치 따진다거나, 스스로 비하하며 빈정대기 일쑤였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모용수는 자신의 잔과 담천의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는 잔을 치켜 올렸다. 모용수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 듭시다.”
담천의와 추학 역시 잔을 두 손으로 들고는 모용수와 같이 단숨에 들이켰다. 담천의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 같기도 했고, 이 기이한 일련의 사태에 다소나마 호기심도 있어 하는 표정인 것도 같았다.
“한 잔 더 하시겠소?”
이번에는 담천의가 술병을 들면서 추학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추학은 얼굴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입술 끝에 일그러진 미소는 여전했지만 빈정대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애매했다.
“허... 감히 뉘 안전이라고 잔을 거절하겠소? 손수 따라주시겠다니 영광이오.”
이미 담천의 내력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추학의 말투는 기이해서 그 스스로 그렇게 의도하지 않아도 남들에게는 빈정대는 듯 들렸다. 그럼에도 찻잔을 자신의 눈높이 위로 치켜 올려 술을 받는 태도는 매우 정중해 보였다.
술병이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추학의 찻잔에 술을 채우고 나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천의가 모용수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 나니 자신의 잔을 끝내 채우지 못했다. 술이 잔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기는 것은 그 날 그 사람의 운수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속설도 있었다. 그것을 본 모용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 객이 끼다보니 술이 벌써 떨어졌구려. 한 병 더 시켜야겠소.”
“아니오.... 된 것 같소.”
모용수가 점소이를 부르려하자 담천의가 말렸다. 이어 자신의 배를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지 않고 온 상태에서 술을 몇 잔 들이켰더니 배가 탈이 났나 보오. 잠깐 자리를 비우리다.”
말은 모용수에게 했지만 가볍게 탁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예를 취하고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마 측간에 가는 것 같았다. 자리에 남은 모용수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담천의와 한 잔 나누고 떠나려던 것이 청하지 않은 객들로 인해 엉망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부드러운 황형전계가 아주 뻣뻣하고 질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음식을 몇 점 집어먹다가 젓가락을 놓았다. 이 자리에 조금만 더 있다가는 예의고 뭐고 폭발할 것 같았다. 모용수는 담천의가 탁자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담형.... 어찌하다보니 주객이 전도되었소. 가다가 다시 식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갑시다.”
모용수의 말에는 은근한 노기가 섞여있어 그가 정말 화가 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엽 역시 삼색소채 몇 점을 먹다가 이미 젓가락을 놓은 상태였다. 모용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담천의가 고개를 끄떡이자 모용수와 일엽은 빠른 걸음으로 객점을 나가기 시작했다.
“어....아직 음식이 남았는데 벌써 나가시려는 거요?”
부지런히 음식을 먹던 사내가 소리치자 모용수가 고개를 홱 돌리며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빈정댔다.
“귀하나 실컷 드시고 천천히 오시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사내를 째려보는 모용수의 눈에 언뜻 살기가 배어나온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이미 모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객점을 나간 후여서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사내외에는 없었다.
“화가 잔뜩 났군. 재미있겠어.”
중얼거린 사내는 힐끗 추학을 보았다.
“따라 가시지 않소?”
추학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눈에 황급히 객점을 빠져나가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보였다.
“아마 당신도 예외인 것 같지는 않은데.....”
두 사람은 놀리던 젓가락을 놓고는 황급히 객점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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