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22회

등록 2005.12.07 08:07수정 2005.12.0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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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본래 구석자리에 앉지 못하오. 고질병인지 모르지만 옆이 막혀 있으면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기 때문이오.”

사실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모용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내는 구석자리를 보며 정말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숨을 크게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높은 곳에 올라서거나, 막혀있는 곳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이 사내가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귀하의 마음대로 합석을 하실 수 있단 말이오?”

기이하게도 말을 하는 모용수는 오히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당하게 소리쳐도 될 법한데 무슨 연유인지 오히려 사정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담천의는 내심 기이한 생각이 들었고, 나타난 사내에 대해 호기심이 치솟아 올랐다. 분명 자신을 미행한 자임이 틀림없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모용수에게 볼 일이 있는 듯 하지 않는가?

(누구일까? 아무래도 모용형은 저 사내의 내력을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모용형마저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인가?)

담천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사내의 내력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눈빛은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 같기는 한데, 사실 눈빛이란 것도 비슷한 사람이 많아 반드시 보았다고 단정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다만 모용수가 대하기 꺼려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짐작 가는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 사내가 모용수마저 조심스럽게 대할 정도라면 우교가 모를 리 없었고, 자신들을 미행했던 인물이니만큼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며 내력을 파악했을 터였다. 하지만 우교 역시 알지 못하는 듯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사해(四海)에 있는 사람은 모두 친구라 하지 않았소? 귀하와 내가 설사 일면식이 없다 해도 무슨 문제가 있겠소? 모른다면 이제부터 알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근거도 없는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묘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딱 부러지게 서로 모른다고 하는 말도 아니었고, 안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는 분명했다. 모용수가 안다고 한다면 아는 것이고, 모른다고 한다면 모르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모용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자신의 입장도 밝히겠다는 은근한 협박도 될 수 있었다.


모용수는 이제 곤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는 듯 했고, 뚜렷하게 이 무례한 사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용수는 일엽을 보았다가 다시 담천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사내에게 돌렸다.

그렇다고 일엽이나 담천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 같지는 않았다. 모용수는 사내를 복잡한 시선으로 잠시 보더니 지금까지의 당황과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오히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띠웠다. 마음을 작정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음으로 사내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전음이란 것도 복화술(複話術)이나 의어전성(蟻語傳聲)과는 달리 표시를 내지 않고 할 수는 없다. 미세하나마 입술을 오물거린다거나 얼굴 근육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전음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뻔한 일. 아마 일엽과 담천의를 힐끗 주시했던 것도 그러한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귀하의 말도 맞는 것 같구려. 하지만 굳이 귀하를 알고 싶은 마음은 없소. 귀하는 음식을 들고 곧 가실 것 아니오? 기분은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귀하가 그런 몹쓸 병을 앓고 있다하니 참아주겠소.”

“매우 고마운 말씀이오.”

사내는 모용수가 합석을 마지못해 승낙하자 반색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모용수는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남는 자리에 합석했다고 귀하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것도 아니니 이제는 신경 쓰지 말고 음식이나 시켜 드시구려.”

“거... 무척 섭섭한 말씀이구려. 같이 합석하기로 했지 않소? 응당 이미 시켜 놓은 음식이 나왔으면 예의로라도 권할 일이지 어찌 그리 박정하시오? 마치 탁자를 칼로 베어 따로 떼어 놓은 것처럼 그럴 수 있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적당한 말 같았다. 기껏 합석을 승낙했더니 이젠 음식까지도 달라는 말이다. 사내의 말마따나 모용수는 할 수만 있다면 탁자를 네 조각 내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흠..... 이 술이 무언지는 몰라도 기가 막힌 주향을 풍기는구려. 더구나 제 철을 맞은 게요리라니..... 흠....흠..”

사내는 오히려 술병 가까이에 코를 대면서 탁자에 놓인 음식을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군침을 삼키며 보고 있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먼저 손을 대지는 않고 권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모용수는 가슴 속에서 노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얼굴색은 변함이 없이 더욱 침착하고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멀쩡해도 아마 구걸에 있어 전설적인 취걸개(醉乞丐) 나선배와 비견될 분이구려.”

비꼬는 말이었다. 취걸개 나문백(羅聞佰)은 현 개방에서 가장 뻔뻔스럽기로 유명한 노개다. 구걸에 있어 살아있는 전설로 여길 정도로 그는 누구에게나 구걸을 할 수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취걸개란 명호보다 철면금강(鐵面金剛)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 경우에는 낯짝이 두껍다고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나선배 정도까지야 되겠소? 하지만 추레한 몰골로 악취 풍기며 얻어먹는 것보다는 번듯한 것이 오히려 좋지 않소?”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태도였다. 말로는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었다. 문득 모용수가 고개를 흔들다가 놀랍게도 자신의 술잔을 사내에게 건네며 술을 따라주었다. 아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기로 한 것 같았다. 이런 작자는 얼른 처먹여 보내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일지 몰랐다.

더구나 그때 마침 점소이가 커다란 두 개의 접시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홍소어시와 황형전계(黃炯全鷄)입니다요. 헤헤....”

점소이는 매우 바쁜 듯 새로 온 사내를 힐끗 보고는 모용수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휑하니 물러갔다.

“자식.... 기분 나쁘게 쳐다보긴.... 그래도 상당히 눈치 빠른 녀석이군.”

사내는 모용수가 따라 준 잔을 단숨에 비어 버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연화백(蓮花白)의 향기를 음미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빈 잔에 술을 따라 다시 한 번 훌쩍 마셨다.

“정말 좋군. 이 술이 뭐기에 이리도 향기롭고 감 칠 맛이 나는 것이지? 헌데 이상하네?”

사내는 세 사람의 어이없어 하는 시선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사내는 갑자기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뒤끝 맛이 왜 이렇지? 뭔가 섞었나?”

그가 한두 번 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는 듯하자 모용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웃듯 말했다.

“잔을 비웠으면 돌려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오? 예의를 그리도 따지시는 분이 자신의 잔인 양 연거푸 마셔대는 건 어떤 경우요?”

“아니... 뒤 끝 맛이 이상해서 한 잔 더 마셔본 것인데.....”

“아... 됐소. 얻어먹는 사람이 뭐 그리 따지는 거요? 안주나 실컷 드시오.”

모용수는 말과 함께 사내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빼앗다시피 가져다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담천의를 보며 잔을 치켜들었다.

“담형..... 상관하지 말고 빨리 들고 갑시다.”

언뜻 보기에 모용수는 이 사내를 귀찮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워하는 듯 했다. 담천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잔을 치켜 올리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이 황형전계(黃炯全鷄)는 아주 부드럽구려.”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담천의가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한 말이었다. 헌데 그 때였다. 기이한 사내의 출현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그들 탁자로 다가 온 또 다른 사내가 있었다.

“나도 이 자리에 합석하면 안 되겠소? 마침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오.”

서 있는 인물은 도복(道服)을 걸친 삼십대 후반의 인물이었다. 그는 일엽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시선 역시 일엽을 향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일엽의 맑고 고요한 눈에 파랑이 일고 있었다.

(제 77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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