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역시 담형의 눈은 매우 예리하구려. 일엽형의 모습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읽기 힘든데 척 한 번 보고 파악하는 것을 보니 말이오.”
“그저 짐작이었소. 일엽형의 모습이 너무 청수하고 고요해 도(道)에 정진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뿐이오.”
하지만 담천의는 내심 궁금증이 구름처럼 일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도관이 아니라면 저런 인물을 키워내기 어렵다. 적어도 구파일방 중 도가(道家)의 맥을 잇는 무당이나 화산, 점창, 곤륜 정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자존심 높은 구파일방의 제자가, 더구나 이미 상승경지에 달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 무림세가의 가신이 되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본인을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감당하기 어렵소.”
일엽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이며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 맑아 고요한 호수를 연상케 했다. 일엽이란 인물과 마주 앉아 있을수록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내력도 더욱 궁금해졌다.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모르나 분명 무림세가의 가신으로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별 말씀을....”
담천의 역시 일엽의 포권에 가볍게 답례했다. 상대를 인정하면서도 두 사람 간 묘한 기운이 흐르자 모용수가 차를 따르며 말을 돌렸다.
“담형.... 소식은 들었소?”
“어떤 소식 말이오?”
“천마곡의 입구가 붕괴되었다고 하오. 이미 군웅 일부는 천마곡 안으로 진입했는데 입구가 붕괴되는 바람에 아직 곡으로 진입하지 못한 군웅들과 나누어진 것 같소.”
이미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천마곡과 가까운 진성현은 물론 하북성과 인근 산동과 산서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담천의 역시 이곳에 오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구양형 일행은 어찌 되었소?”
“구양형은 이미 세가들과 함께 천마곡에 진입했다고 들었소.”
“연락은 가능하오?”
“어려운 것 같소. 소제의 아버님께서도 천마곡 내에 계신 듯 하오만 어제 보낸 전서구가 돌아올 시각이 이미 한참 지났건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소.”
잠시 대화가 끊겼다. 연락까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이미 상대가 고의적으로 입구를 봉쇄한 이상 진입한 군웅들은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가 치밀하게 연락마저 봉쇄하고 있다는 점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담천의가 다시 물었다.
“연락마저 두절되었다면 곡 내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니오? 입구가 무너졌다하나 전혀 진입을 할 수 없는 지경이오?”
“자세히는 알 수 없소. 가 봐야 알겠지만 입구가 무너졌다 해도 대규모 인원은 힘들겠지만 몇 몇 소수정예라면 타고 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오.”
결국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 방도를 강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때 마침 점소이가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는데 제법 이름난 도공이 구운 듯이 보이는 백자(白瓷) 술호로를 탁자에 내려놓았는데 이미 마개가 열려있어 향긋한 주향이 풍기고 있었다.
빨리 만들 수 있는 삼색소채와 통째로 찐 몇 마리의 게가 담긴 접시가 탁자에 놓여졌다. 김이 나는 것이 허기가 지지 않아도 먹음직한 요리였다.
“나머지 음식도 금방 올리겠습니다요.”
집어 준 은덩이가 효력을 발휘하는지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차 있는 상황에서 먼저 온 손님보다 음식이 빨리 나온 것 같았다. 모용수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헌데 기이하게도 모용수 자신의 잔과 담천의의 잔에만 따르고는 일엽의 앞에 놓인 잔에는 차를 따랐다.
“자... 듭시다. 마차를 준비하길 아주 잘한 것 같소.”
술을 마신다 해도 마차 안에서 쉬면서 가게 되니 잘되었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술이 취한 상태에서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를 경공을 펼치거나 말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 모용수가 두 손에 치켜들며 잔을 올리자 담천의 역시 술잔을 잡아 위로 올렸다.
“헌데 일엽형께서는...?”
“본인은 술을 배우지 못했소.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으니 이해해 주시오.”
일엽은 말과 함께 찻잔을 들어 술을 마시듯 훌쩍 마셨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처럼 보였다. 담천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단숨에 잔을 비웠다. 향긋한 주향이 입안을 감돌더니 목에 싸한 느낌을 주었다. 맛이나 향기는 무척 좋은 술이었지만 매우 독한 것 같았다.
“.......!”
그 때 잔을 내리던 담천의 눈에 막 주루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사내가 보였다. 그 사내는 누군가 찾는 듯 했는데 담천의를 보더니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담천의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담천의는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자는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우교가 전음으로 알려준 그 사내였다. 미행이란 본래 상대가 모르는 가운데 은밀하게 뒤쫓는 것이 아니던가? 헌데 저 인물은 이제 대놓고 따라다니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담천의가 그들 탁자로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그 모습을 본 모용수와 일엽 역시 그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천의가 유심히 보자 호기심이 일어 본 것이었는데 모용수는 무심코 그 사내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개를 급히 다시 돌리며 그 사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헌데 그 사내를 다시 자세하게 보는 모용수의 눈 깊숙한 곳에서 놀람과 당혹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이한 기색은 사내가 그들 탁자 앞으로 다가올 즈음 말끔하게 사라졌고 오히려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죄송하오만 앉을 만한 자리가 없구려. 합석을 해도 되겠소?”
사내는 세 사람의 얼굴을 천연덕스럽게 둘러보며 담천의와 일엽의 사이에 있는 의자를 탁자 밑에서 빼냈다. 당연히 승낙할 것이라는 모습이었는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주 당연한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의 행동은 뻔뻔스러웠을 뿐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웠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세 사람이 말릴 시간도 없었다. 모용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짓으로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빈 자리가 있지 않소?”
사실 합석이란 값싼 객점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지, 나름대로 이름난 이런 주루에서는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합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합석을 하려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한 후에 승낙을 받고 앉아야 하는 법이다.
사내의 행동은 몰상식했을 뿐만 아니라 무례했다. 뒷골목의 시정잡배나 건달들이나 하는 너무 무례한 행동이어서 두들겨 패서 내쫓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모용수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모호했다.
모용수가 차분한 성격으로 다툼을 싫어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렇게 무례한 작자를 그냥 내버려둘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용수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지도 않았다.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기는 했으나 어서 이곳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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