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결은 숨을 집어 삼킬 여유도 없이 좌장(左掌)을 쾌속하게 내밀며 어깨를 벤 인물의 등짝을 향해 날렸다. 동시에 상엽을 향해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인물들의 검에 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상엽만큼은 죽이겠다는 모습으로 보였다.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에 상엽은 일순 당황했으나 그는 피하지 않고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려 백결의 검과 마주쳐갔다.
파팍---!
검과 검이 마주치며 팔목에서 시작한 충격은 전신으로 밀려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차단되며 엄청난 기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순간 백결의 몸이 뒤집어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백결은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검과 검이 마주치는 반탄력으로 몸을 좌측으로 날리며 한 인물의 머리를 타고 넘었다. 애초부터 상엽을 죽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는 네 명의 포위를 벗어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엽사형제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금세 백결의 의도를 간파한 좌측에 있던 사내가 몸을 뒤로 눕히며 백결의 등허리를 찔러왔다. 그것은 매우 쾌속한 반응이어서 백결이 예상하지 못했던 수였다. 그의 허리에 꼼짝없이 검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까--강---!
하지만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하나의 검날은 그 사내의 검이 백결의 몸에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백결의 좌산인인 잔흠(潺歆)이 모습을 보이며 사내의 검을 쳐내는가 동시에 사내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던 것이다. 하륜의 배반으로 유일하게 남은 백결의 수하였다.
사내가 주춤 뒤로 물러나는 사이 백결은 잔흠과 지체하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급히 몸을 날렸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도망가는 것이다. 무인으로서 도망간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런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얽매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쫓아라…! 반드시 죽어야 해.”
그와 잔흠이 도망치려는 것을 간파한 과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특히 담천의와 백결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 했다.
백결의 신형이 어느새 허공에 몇 번 도약하자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급박하게 도망을 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돌려 힐끗 전월헌과 대치하고 있는 담천의에게 전음을 날렸다.
'연동 입구에서 보세나. 다만… 전월헌의 보이지 않는 유리검(琉璃劍)을 조심하게.'
전음은 매우 또렷했지만 끝말은 이미 이십여 장 밖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헌데 유리검(琉璃劍)이란 무엇일까? 전월헌이 사용하는 연검의 이름인가? 그러나 전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백결이 급히 도망가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상엽 사형제와의 승부는 이런 상황이라면 반드시 패한다. 잔흠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상엽사형제가 펼치는 합공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승산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자신이 패한다면 오히려 같은 편이라 할 수 있는 담천의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또한 송하령의 사촌 오빠 임을 아는 담천의가 자신이 당하도록 내버려 둘까? 아마 자신을 도우려하다가 오히려 상대에게 틈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쫓기다 보면 상엽 사형제와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었다. 저들 네 명 중 한 명만이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완벽한 연수합격은 불완전하게 될 것이었다.
다만 그가 도망가는 것을 망설인 이유는 과연 상엽 사형제가 자신을 뒤쫓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상엽의 사형제가 자신을 뒤쫓지 않는다면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담천의에게 부담이 되는 꼴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상엽 사형제는 자신을 뒤쫓아 오고 있었다. 이제 백결은 승산이 전무한 상태에서 최소 삼 할의 승산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 담천의와 전월헌은 이미 삼 초식을 주고받은 후에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떠오르고 전신에서는 예기(銳氣)만으로도 살갗을 에일 것 같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서 있는 공간 안에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이 떠돌았다.
“……!”
전월헌은 그의 삶을 통하여 몇 번 느껴보지 못한 긴장과 흥분이 자신의 몸속을 헤집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신을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은 오랜만에 그에게 승부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상대는 예상대로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승부에 대한 맹렬한 투지는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능력이 되었던,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그리되었던 간에 상대는 자신이 넘을 수 없다고 느꼈던 강명 사형의 오른팔을 잘라낸 인물이다. 호승심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랜 만에 승부다운 승부를 해 볼 만한 상대가 나타났음은 무인에게 있어서는 희열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자네만큼은 일을 떠나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지. 더구나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던 것도 솔직한 내 심정이었네.”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오.”
어찌 들으면 비웃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결코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담천의 역시 전월헌이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의 존경을 받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네. 그 중 한 분의 팔을 자네가 잘라냈다니 나는 몹시 화가 나는군.”
정말 그랬다. 그는 강명이란 인간을 존경했다. 그에게는 오직 무도(武道) 하나뿐인 삭막한 삶이었지만 그의 구도자(求道者) 같은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말은 없어도, 표정으로 나타내지는 않아도 강명은 그저 우뚝 서 있는 태산이었다.
전월헌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솔직했다. 그것은 담천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른 것이 아니라 잘려준 것뿐이오. 당시 내 능력으로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도 잘라낼 수 없었을 것이오.”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지금 자네 말을 들어보니 그때와 달리 이제는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리는군.”
자신이 존경하는 강명사형을 어찌할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강했다. 그의 검은 거침이 없었고, 변변히 받아낼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명령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자와 승부를 간절히 바랬던 것은 강사형의 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내 오른팔을 자르도록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앞으로 삼년만 흐른다면 나 역시 자신할 수 없는 아이다. --
강명사형이 그토록 높게 평가할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강명사형과 저 자의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강명사형은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아직 부족할지 모르오.”
괄목상대(刮目相對)라…. 저 자는 그동안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의 말은 최소한 그 당시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담천의를 보며 전월헌은 더욱 맹렬한 투지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전월헌은 힐끗 주위를 둘러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럽군.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떤가?”
장내 뿐 아니라 숲 속에서도 신경을 쓰이게 하는 병장기 소리와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담천의 역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교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전월헌의 좌우산인인 혁잠(爀箴)과 공환(蚣䴉)은 대단한 고수였고, 사혼 역시 살천문의 특급살수였다. 그들 세 명의 합공에 우교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역시 함부로 우교를 공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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