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불가피한 노대통령과 의원들의 숙명

[정치 톺아보기 115] 40대 유시민 장관의 '악역' 대망론과 당·청 갈등

등록 2006.01.09 19:37수정 2006.01.1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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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준비하는 대통령, 예비된 장관 Again 1219! 지난 2002년 12월 19일 밤에 유시민 개혁당 대표를 찾아가 샴페인으로 기쁨을 나눈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당선자.

준비하는 대통령, 예비된 장관 Again 1219! 지난 2002년 12월 19일 밤에 유시민 개혁당 대표를 찾아가 샴페인으로 기쁨을 나눈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당선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윤태영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이 8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국정일기'가 여당 의원들의 응어리진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 잦아들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격이고,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다. 당장 "열린우리당에는 인물이 유시민밖에 없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알려진 윤 비서관은 이날 '준비하는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이다 … (중략) …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 역시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예정하고 준비해온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대통령이 유시민 의원의 입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7월 정동영, 김근태 장관을 입각시킬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통령은 당의 차세대 또는 차차세대를 이끌고 갈 지도자의 재목으로 정세균, 천정배, 유시민 의원 등을 주목하면서 장차 이들을 입각시켜 국정경험을 풍부하게 쌓도록 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윤태영 "'차기'가 아닌 '차(차)세대'라 표현한 것에 주목해 달라"

a 8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국정일기'로 여당 의원들의 응어리진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윤태영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8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국정일기'로 여당 의원들의 응어리진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윤태영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의 핵심 메시지는 노 대통령이 2004년 7월 여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분류된 정동영·김근태 전·현직 의원을 입각시킬 때부터 이미 '유시민 카드'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유망한 정치인들도 '순번'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이다.

이처럼 자존심 상하게 하는 얘기를 듣고 가만 있을 요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아니다. 서명파 모임에 가담한 송영길 의원은 9일 "당이 청와대 부속실이냐"며 "집권여당의 위상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윤태영 비서관은 청와대 제1부속실장 출신이다.

당의 반발이 거세지자 윤 비서관은 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유 내정자의 입각이 (2007년) 차기 대권구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당내에서 검증된 인사들이 장차 당과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일반론적인 얘기다"고 해명했다.

윤 비서관은 또 "내가 '차기'라는 용어가 아니라 '차세대' 혹은 '차차세대'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 달라"고 덧붙였다. 천정배, 정세균 의원이 입각한 경우도 같은 맥락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당은 '바보'가 아니다. 이번 개각에 앞서 일부 언론에 김부겸, 김영춘, 임종석, 이종걸 의원 등 '40대 주자군'에 대한 입각 하마평이 오르내렸지만 이때 청와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시민 의원과 경쟁구도에 있는 40대 재선급 의원들은 물론, 대권 후보급인 정동영·김근태 전 장관과 도매금으로 '차(차)세대'로 규정된 천정배·정세균 의원의 반응도 유쾌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두 그룹 모두 유시민 의원과 같은 '반열'에 오르내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윤 비서관은 당사자인 유시민 의원에게조차도 도움이 안되는 얘기를 한 셈이다.


Again 1219! 노 당선자, 유시민 찾아가 샴페인으로 기쁨 나눠

'준비하는 대통령'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 얘기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윤태영 비서관의 분석이 완전히 들어맞지도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노 대통령은 1년 반 전(前)이 아니라 지난 200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부터 유시민 의원의 입각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생각해 보라, '어게인(Again) 1219'를. 2002년 12월 19일 밤 개표방송에서 당선이 확정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민주당에 이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개혁당이었고, 그곳에서 얼싸안고 샴페인을 병채로 마시면서 기쁨을 나누던 '동지'가 바로 유시민 개혁당 대표가 아니었던가.

16대 대통령 취임사를 준비하기 위해 취임사준비위원회라는 거창한 기구가 구성되었지만 사실 취임사의 실무적 초안은 후보 시절부터 연설을 도맡은 윤태영 비서관의 몫이었다. 그리고 초안을 정독하며 검토하는 과정에 이례적으로 개혁당 대표인 유 의원을 참여시켰다. "유시민 의원에게도 보여라"는 노 당선자의 지시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유 의원은 당이 달라도 그때부터 이미 국정에 참여하며 '한 식구'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유 의원은 지난 연말 복지부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릴 때, 사석에서 "아마도 노 대통령이 200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때부터 나를 장관 시키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취임사 초안 검토에 얽힌 비화를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내가 취임사 초안을 검토하면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자리를 주겠다'라는 말을 써넣었는데 나중에 보니 당선자가 빨간줄로 죽 그어 삭제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선자님, DJ 대통령 때도 했던 말인데 잘 안지켜져서 그렇지 중요한 말인데 왜 지우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당선자는 '공도 있고 능력도 있는 놈은 상도 주고 자리도 줘야 하는데 그렇게 말해 놓으면 못 주잖아, 그래서 안돼' 이렇게 말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얘기는 사석에서 농담으로 한 것이다. 공도 있고 능력도 있다는 당선자 시절 노 대통령의 얘기도, 그때부터 장관시키려고 했을 것이라는 유 의원의 얘기도 농담이다. 그러나 유 의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악역론'을 거론하며 국민연금 등 산적한 보건복지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유시민 "복지부장관 기용은 연금 개혁 등 '악역' 맡아달라는 주문"

a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자료사진)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히려 유시민 의원은 내정 발표 전에 복지부장관 기용 배경을 묻자 "악역을 맡아달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유 의원은 특히 "이해찬 총리의 입장에서는 선배여서 불편한 김근태 의원보다는 후배이고 만만한 저를 데려다 놓고서 이것저것 시키려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하면서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했다. 유 의원은 이 총리의 보좌관 출신이다.

청와대가 유 의원 내정사실을 발표하면서 유 의원이 연금제도 개혁, 사회양극화 완화 등 보건복지 분야의 개혁정책을 밀어붙일 적임자임을 밝혀 이른바 '미래 위기 요인의 해결사'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번 개각에서 언론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유시민 복지장관의 최종 낙점은 노 대통령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해찬 총리의 인사'라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이미 지난 2004년 6월 이해찬 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뒤 일상적인 내치(內治)는 총리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장기적 국정과제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리고 이 총리의 고사(固辭)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10월에는 노 대통령이 총리에게 각료인사권을 넘겨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이번 개각은 이해찬 총리의 실질적 제청권이 광범위하게 행사된 첫 개각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번 개각으로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정치인 출신이 다수 입각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내각제 실험'을 꾀한 내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해찬 총리는 철저히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명망이나 평판보다는 철저하게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유 의원에게 '자리'를 준 것은 그의 '공'과 '능력'을 모두 높이 사서 '권력'을 준 것일 수 있지만, 이 총리의 입장에서는 '일감'을 나누어 준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서명파 '유시민 비토'는 구실일 뿐... 실제론 대통령 국정운영 방식에 '반대'

a 이번 1.2개각에 유감을 표명했던 열린우리당 초재선 의원 20여명은 9일 오전 국회의원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당·청 관계 재정립과 열린우리당 혁신`에 관한 토론을 벌인 뒤 당·정·청 관계의 문제의식 공유를 위한 대통령 면담 등을 요구했다. 김영춘, 이종걸, 최재천, 문병호,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이 9일 오후 국회 기자실에서 모임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이번 1.2개각에 유감을 표명했던 열린우리당 초재선 의원 20여명은 9일 오전 국회의원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당·청 관계 재정립과 열린우리당 혁신`에 관한 토론을 벌인 뒤 당·정·청 관계의 문제의식 공유를 위한 대통령 면담 등을 요구했다. 김영춘, 이종걸, 최재천, 문병호,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이 9일 오후 국회 기자실에서 모임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종석 카드'도 그런 점에서 보면 의문이 쉽게 풀린다. 이종석 통일부장관 내정자는 참여정부 인사 중에서 몇 안되는 이 총리의 서울 용산고 후배이다. 통일외교안보라는 외치(外治)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고유영역이지만, 이종석 카드는 현장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이 총리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인사다.

이 총리는 또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그 조직에 '일을 잘하는 자기 사람'을 남의 눈치 안보고 소신껏 밀어넣는 스타일이다. 이 총리는 지난 97년 대선 뒤 대통령직인수위를 구성할 때도 앞뒤 안 재고 인수위에 '함께 일할 자기 사람'을 많이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이번 개각에서 최고의 '적재적소 인사'는 유시민 복지장관 내정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정부 시절의 의약분업 시행 때처럼 국민들로부터 욕 먹을 각오하고 일하는 장관을 꼽으라면 말이다.

그러나 유 의원에게 맡긴 '악역'의 대부분이 국민연금 개혁 같은 갈등과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이 모든 갈등과제는 죄다 국회에서 최종적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라는 점에서 여당 의원들까지도 반대하는 유 의원을 앉힌 것은 '나이브'한 발상일 수 있다.

또 한나라당이 김대중 정부 초기에 김종필 총리 인준을 거부한 것처럼 복지부 안건에 대해 사사건건 '태업'으로 맞설 경우, 유시민 입각은 욕은 욕대로 먹고 소기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서명파의 '유시민 비토'는 구실일 뿐이지 실제로는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구상 및 방식에 대한 '공개 반대'라는 점에서 당·청간의 대립양상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단임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과 의원들의 '이해관계'와 국정 우선순위는 기본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미래 위기 해결'을 최대의 개혁으로 여기는 대통령과 '정권 재창출'을 최고의 개혁으로 삼는 당과 의원들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당선된 순간부터 '레임 덕'을 걱정하며 역사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단임제 대통령과, 당선된 순간부터 '정권 재창출'을 염두에 두고 연임을 준비하는 의원들의 '불협화음'은 개헌을 통해 '선거주기'를 일치시키지 않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는 한국 정치의 숙명이다.

이를 좀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작금의 당·청 간의 파열음은 '정권 재창출'을 우선하는 여당 의원들과 '미래위기 해결'을 우선하는 대통령이 빚는 불협화음인 셈이다. 다만, 그 파열음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 지나치게 일찍 터져나온 것은 '역사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노 대통령과 '당대의 민생'을 중시하는 여당 의원들 사이의 인식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 아닐까.

결국 시간이 문제일 뿐, 그 인식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한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어차피 함께 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관측이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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