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대만 때문에 북한 포기 않는다

미·중의 대만-북한 교환 시나리오, 타당성 없다(2)

등록 2006.01.24 09:36수정 2006.01.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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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미국과 중국 간에 대만-북한 교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항간의 가설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검증하기 위하여, 제1편에서는 미국이 과연 대만을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이번 기사에서는 중국이 과연 북한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다시 말해, 중국 입장에서 북한과 대만 중 어느 쪽이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표현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 속에는 마치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권리'라도 갖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동북아 유사시에 중국이 북한에 대한 개입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위 표현이 오해를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많은 독자들이 그러한 표현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입장에서 북한과 대만 중 어느 곳이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혹 중국정부의 공식적 언사(言辭)에 좌우될 수 있다. 양안관계(중국-대만 관계)를 최우선 사안으로 다루는 듯한 중국정부의 공식 태도에 영향을 받아, 중국에게는 대만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점만 갖고는 중국정부의 내심을 파악할 수 없다. 설령 북한이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곳이라는 판단을 했다 해도, 중국정부는 그러한 인식을 대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표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 지역에 엄연히 주권국가가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인식을 드러내게 되면, 이는 당사자인 북한을 불쾌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미국·러시아·일본의 견제를 초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중국이 대만에 대한 '의욕'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하여도, 그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국제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연합(UN) 등 국제무대에서 전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정부가 공식 석상에서 대만을 더 강조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 북한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공식적인 태도와는 달리, 중국정부가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6자회담에 대해 중국정부가 많은 외교적 역량을 투입하고 있는 점 외에도, 일반 중국국민들을 상대로 북·미 간의 핵문제에 대해 열띤 홍보를 하고 있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중국 외교부, 시골 교사의 북핵해법 참고"(<오마이뉴스> 2004년 8월 11일자 기사)에서 필자가 소개한 바 있듯이, 중국은 대중적 역량까지 6자회담에 동원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정부가 북한과 대만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국정부의 공식적 언사를 통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중국정부의 내심을 파악하려면, 제1편 기사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현재의 동북아 환경은 물론 과거의 선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될 것이다.

먼저, 북한과 대만이 오늘날 중국의 안보환경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검토해 보기로 한다. 제1편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만이라는 곳은 외부 세력이 중국 양자강 연강(沿江)과 동남 해안의 경제발전지역을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다.


그에 비해 북한은 수도 베이징과 최단 거리에 있는 '외국'일 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더불어 만주를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의 외교 담당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은, 한반도에 적대 정권이 수립되고 그 정권이 만주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 중원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지역의 전략적 의의만을 놓고는, 중국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이러한 경우에는, 과거의 선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이다. 과거에 중국이 어느 쪽에 전략적 우위를 두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미래 현상의 예측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글에서는 3가지의 대표적 사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전쟁이다. 이것은 중국의 한반도정책의 기조를 보여 주는 최근 사례가 될 것이다. 국공내전을 막 끝내기는 했지만 대만까지는 장악하지 못한 불완전한 상황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북한에 파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에 북한에게 입은 은혜 때문이라고 하거나 사회주의국가 간의 의리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국제관계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본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중국이 의용군을 파견한 것은 본질적으로 국가적 실리 때문이다.

지형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압록강과 요하(遼河)만 건너면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베이징에 금방 당도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은 미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사태를 수도 베이징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한 절박한 인식이 있었기에, 대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도 이미 오랜 전쟁으로 지친 상태에서, 자국 군대를 한국전쟁에 투입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의 전략적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면, 중국은 한반도에서 북한과 미국 간의 전쟁이 발발한 틈을 이용하여 대만을 확실히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째, 1870년대 이후 북양대신 리홍장의 외교정책이다. 당시 중국은 미얀마-베트남-대만-유구-조선에 빙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지역은 마치 병풍처럼 중국을 다른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이 중국의 적대 국가들에게 하나씩 넘어가면서 중국의 안보환경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고, 맨 마지막에 대한제국이 멸망(1910년)하자 그 2년 뒤에는 청나라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제1편 기사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유구는 1879년에 일본에 합병되어 오키나와로 개칭되었다. 이전에 중국의 번국(藩國)이던 미얀마(당시 명칭은 緬甸)는 영국군에 의해 1885년에 멸망했고, 역시 번국이던 베트남은 1885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만은 1874년에 일본의 침략을 받은 데 이어 1895년 마관조약(하관조약,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에 할양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리홍장을 필두로 하는 중국 외교 라인이 조선과 대만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시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중국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리홍장의 인식을 중시하는 것은, 당시 광서제라는 황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홍장이 오랫동안 내정·외교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서양 외교관들은 광서제를 만나는 것보다도 리홍장을 만나는 것을 더 중시하기도 했다.

그럼, 리홍장은 조선과 대만 중에서 어느 쪽을 우선시 했을까? 1874년에 일본이 중국령 대만을 침략했을 때에도,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적극적 반격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에 리홍장은 조선 방어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하고 있었다. 당시 대만은 정식으로 중국 영토였고 조선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조선에 전략적 우위를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홍장의 문집인 <이문충공전집>에 의하면, 1879년에 이토우 히로부미의 지휘 하에 일본이 유구를 합병했을 때에도, 리홍장은 그에 대해 반격을 가하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선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유구는 이미 일본에 넘어가고 대만도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리홍장의 조선 우선시 정책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리홍장은 임오군란(1882년)을 빌미로 사상 초유의 대(對)한반도 군사개입을 감행하는 등 이전에 없었던 적극간섭정책을 실시했다.

그렇다면, 대만을 사실상 포기하고 조선에 우선순위를 둔 리홍장의 외교정책은 당시 성공을 거두었을까? 리홍장의 한반도 우선정책은 당시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은 그 덕분에 사상 최초로 한반도의 내정·외교에 간섭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경쟁에서 1894년까지 12년간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 시기는, 무너져 가는 청나라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발판으로 외교 방면에서 중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대만보다는 한반도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청나라가 결국 망한 게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청나라가 망한 이유는 한반도를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반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대한 지나친 간섭으로 조선의 반발을 초래하고 또 일본의 해군력 증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 패전으로 조선을 상실한 청나라는 조선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내주어야 했다. 한반도를 일본에 내준 뒤에 청나라는 대만도 할양해야 했으며, 또 1905년 이후로는 만주에 대한 영향력마저 점차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한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도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1870년대 이후 시기에도 중국 외교 라인은 대만보다는 조선을 더 중시했으며 조선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청나라도 붕괴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명나라와 청나라가 멸망하게 된 공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1592~1599년) 시기에 일본의 조선 침략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명나라는 여진족 견제를 위한 만주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로 인해 만주 병력을 상실한 명나라는 결국 여진족의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청나라도 조선과 운명을 함께했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중국 왕조의 운명이 한반도 상황에 의해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대표적인 3가지 사례만 놓고 보아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대만에 대한 이해관계보다 낮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중국인들이 대만보다는 한반도를 더 중시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한중관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비유한다. 그만큼 양국의 운명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양안관계를 순망치한에 비유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중국이 대만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을 포기할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동북아 국제환경에 질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중국이 대만 때문에 북한을 포기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1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기 위해 대만을 포기할 것이라는 가설 역시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 대만-북한의 빅딜이 있을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은, 현재의 조건과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에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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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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