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곳에서 운기하거나 머물 시간이 없었다. 여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안방이었다. 그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핏덩이를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동굴 안이었지만 매우 넓은 곳이었다. 수백 명이 있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 듯 주위를 살피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한쪽 구석으로 지하수맥이 동굴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듯 내를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시작하는 곳은 기암괴석이 엉켜있는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였다. 목포는 어둠 속에 잠긴 채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마 자신과 백결이 암동을 지나 저 폭포 위에서 떨어진 곳 같았다. 그가 떠밀려 내려와 있는 곳의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아보였지만 폭포 아래부터 벽 쪽의 물살은 꽤 빠른 편이었다. 폭포와 물살이 흐르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아마 폭포 위에서 내려 꽂힌 후 물살에 밀려 얕은 곳까지 밀려 떠내려 왔는지 그는 그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뒤쪽으로는 어둠에 잠겨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희미해지는 시야로 죽은 듯 누워있는 백결이 보였다. 그는 안간 힘을 쓰며 만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그냥 정신을 잃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으--욱--”
움직이자 가슴뿐 아니라 전신에 고통이 가중되었다. 몸이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의 고통에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싸움은 반드시 타인하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힘들다. 자신의 고통과 유혹을 이기는 일이 무엇보다 힘든 일이다. 만일 완벽하게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복부가 갈라져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금색 면구(面具)를 쓰고 있었다. 바로 남궁정천이 간혹 어디선가 나타나 무림인들을 공격했다고 말했던 그 자들인 것 같았다. 백련교도와 관계가 있는 듯 했지만 이들은 분명 백련교도가 아니었다.
(오존(五尊)…? 사행기(四行旗)는 무엇이고 금룡기(金龍旗)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언뜻 죽은 두 사내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이들은 금룡기에 속해있는 자들 같았다. 자신들을 제외한 사행기라 했으니 오행기(五行旗)란 조직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금룡기는 남아있다고 했으니 분명 이들의 동료는 이곳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이들 동료가 몰려온다면, 아니 한 명만이라도 온다면 자신과 백결은 죽은 목숨이었다.
결과는 그랬지만 이 자들은 결코 자신의 한 수에 죽을 인물들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안이했고,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당한 것뿐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한 사내의 발목을 잡아 흐르는 물 쪽으로 끌어 당겼다.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무릎 정도까지 잠기게 되자 쉽게 끌려왔다. 그는 꽤 세찬 물결에 사내의 시신을 밀어 넣었다.
물이 어디로 흘러나갈지는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이들 동료의 눈에 띄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는 몰랐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의 흔적은 없애야 했다. 또 한 사내의 시신도 힘겹게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게 하고는 백결 옆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기혈이 마구 들끓고 있었다. 피가 계속 역류해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했다. 입과 코에서 선혈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백결을 깨어보려고 흔들었지만 전혀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이목을 피할 곳….)
그는 주위를 훑었다. 물 흐르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백결을 안아들려고 하였지만 이내 포기했다. 백결을 안아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큰일이군…!)
이제 온몸에 고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이미 기혈이 뒤엉켜 제어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자칫 시기를 놓치면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백결의 등 쪽에서 양옆구리를 잡고 끌다시피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쪽에 숨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곳은 어둠에 잠겨있어 금방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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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같은 놈… 죽어라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더니 결국 연동으로 들어오기 위한 속셈이었군. 하지만 네 놈은 스스로 무덤에 걸어 들어온 꼴이다. 이 안에서 절대 빠져 나가지 못한다.”
섬뜩한 살기가 배어있는 상엽의 목소리였다. 그는 어깨서부터 가슴까지 길게 찢어진 옷 속으로 피가 나오다 멈춘 듯 상의는 피가 진득하게 배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형제를 잃은 분노는 그 어떠한 고통보다 컸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은 고통이랄 수도 없었다.
“용천관(湧泉關)으로 기어 들어갔소.”
유항의 완벽한 나상이 있는 원형 석실이었다. 백결의 미세한 흔적조차 놓치지 않고 살피던 인물이 담천의와 백결이 들어갔던 입구 쪽에서 소리쳤다. 네 명의 형제 중 셋째인 상문(霜雯)이었다. 이제는 네 명에서 둘째가 죽어 세 명이 된 그들은 친형제였다.
열 살의 나이로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막내를 안고 배불리 먹여준다는 말에 들어 선 길이었다.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지만 상엽은 마치 자식처럼 동생들을 돌보았다. 다행히 상엽을 비롯한 그들 사형제의 재질은 뛰어났고, 그들은 무림인이라면 몽매 그리는 무학을 배울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게으르지 않았고 너무나 충직하여 그들을 거두어준 분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명령을 수행하는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헌데 사십 중반에 들어 선 상엽에게 처음으로 형제를 잃은 비운을 맛보게 했다. 둘째의 죽음은 그와 남은 형제들에게 충격 이상이었다.
“안 돼…! 그 놈이 편안하게 수장(水葬)되면 안 된다.”
상엽의 얼굴에 지독한 살기가 떠올랐다. 용천관이 어떠한 기관인지 이미 아는 터. 그 놈 무공 수위로 보아 질식해 죽지는 않겠지만 자신과 형제들의 검에 중상을 입은 상태다. 자칫 물에 휩쓸려 질식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된 것 같으냐?”
“최소 한 시진 전이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여기까지 빠르게 온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 놈을 돕는 자가 있소.”
“상관없다.”
“어쩌면 이미 금룡기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소.”
옆에 서 있던 넷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룡기의 손에 들어갔다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상엽의 얼굴엔 더욱 지독하고 단호한 기색이 떠올랐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아무리 오행기의 손에 들어갔다 해도, 오행기가 그 자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형님…!”
자신들의 마음도 상엽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직은 엄격하다. 지금까지 그들은 한번도 조직의 명령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설사 나중에 그 분의 처벌을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 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심장을 도려내고, 숨통을 끊어 놓겠다.”
말을 마친 상엽이 입을 꽉 물고 무겁게 걸음을 떼었다. 그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 놈만큼은 정말 자신의 손으로 지독한 고통을 안기면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동혈 입구로 들어서자 셋째와 넷째가 급히 뒤를 따랐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맏형은 둘째형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허나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형제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나뭇가지로 덮어 놓았다. 중원 외곽의 고지 부족들이 풍장(風葬)을 지낸다고 들었지만 자신의 형제를 그렇게 방치했다는 죄책감도 분노를 들끓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점점 좁아지는 동혈을 따라 들어가면서 그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백결, 그 놈만큼은 반드시 그들 손으로 죽여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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