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 그 성과로 정국의 반전을 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북풍의 원조는 96년 4·11 총선 전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
물론 4·11 총선 이전에도 역대 선거 때마다 국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야기시키는 '북한 변수'에 의한 선거 개입 의혹이 있었다. 87년 대선 직전에 발생한 KAL기 폭발 사건 폭파범 김현희의 압송 입국, 92년 대선 전에 안기부가 발표한 거물 간첩 이선실 및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두 사건은 각각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김영삼의 당선에 기여했다는 것이 여론조사 및 선거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남측에 대한 '안보위협'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띤 북풍과 달리, 주로 북측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띤 남풍도 있었다. 지난 95년 6·27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YS 정부가 대북 쌀 지원을 결행한 것이 그 예이다. 또 지난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남북한 당국이 6월 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공표한 것도 '남풍'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이건 YS 정부의 대북 쌀 지원은 차가운 북풍에 대비하자면 훈훈한 기운이 도는 일종의 남풍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역대 선거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남풍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지만 국민들이 인도주의 차원의 대북 지원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민간 차원의 지원조차 엄금했던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정부 차원의 대북 지원을 결정하고, 그것도 선거 바로 전날 국무총리의 환송 하에 쌀 수송선을 출항시키는 등 남북관계를 선거에 이용하는 '얕은 수'에 국민들이 등을 돌린 것이었다.
어쨌건 남풍이 선거에 효과가 없다거나 혹은 자칫 역효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경험은 남북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일정 부분 부정적인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96년 총선 직전의 북풍은 95년 남풍의 반작용 성격을 띤다.
96년 4·11 총선은 남풍의 역효과를 경험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뒤에 치러졌다. 당시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은 신한국당의 참패를 예상했다. 그런 가운데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의 비리사건이라는 악재가 터졌으니 결과는 뻔해 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판문점에서 북한군 무력시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의혹의 눈길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무력 시위 직전에 진로그룹의 고문이 비밀리에 방북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YS 정부가 모종의 대북 지원을 약속한 대가로 북한 측이 무력시위라는 '쇼'를 연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북한 변수, 특히 남한 선거에 영향을 주는 북한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북풍은 바로 그러한 정황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장풍-북풍에 울고웃은 여야'니 '북풍이 장풍을 눌렀다'는 보도는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황풍, 오풍, 총풍 등 각종 북풍의 변종들
그 뒤로 선거에 영향을 주는 모든 북한 변수는 언론에서 간단히 '풍'이라는 단어로 개념이 규정되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97. 2)이 남북관계에 미칠 파문은 '황풍',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월북(97. 8)으로 인한 파장은 '오풍'으로 압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97년 대선 직전에 이회창 후보 특보 명함을 가진 한성기씨 등이 북한측 인사에게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한 '총풍'까지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남북한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북풍(온풍)은 그것이 인위적이건 자연발생적이건 모두 '주최 측'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95년 지방자치 선거 직전의 대북 쌀지원이 그랬고, 2000년 4·13 총선 직전의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 발표가 그랬다.
남북한은 그해 3월부터 박지원·송호경 특사간 접촉을 통해 세 차례 비밀협상을 진행한 끝에 4월 8일 베이징에서 합의서에 서명함에 따라 4월 10일 정상회담 개최 합의사실을 양측 당국이 공동 발표했다. 총선 사흘 전이었다. 결과는 여당의 총선 패배로 끝났다.
당시에도 야당은 남북 정상회담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했다. 정부와 여당(새천년 민주당)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 발표는 '총선용'이 아니고 4월 8일 합의를 했기에 10일 발표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아무튼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우위를 점해온 수도권에서마저 야당에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풍의 원조 격인 96년 4월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이하 '4월 북풍')는 남북한 관계를 개념 규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우선 '4월 북풍'은 남북한의 '적대적 의존관계' 혹은 '적대적 공존관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87년 칼풍(KAL 폭파) ▲92년 노풍(조선노동당) ▲97년 황풍(황장엽 망명)·오풍(오익제 월북 및 편지)·북풍(안기부 대선공작)·총풍(판문점 총격요청 기도) 등 역대 선거 때에 등장한 모든 북풍은 그 진상이 밝혀졌는데 공교롭게도 96년 '4월 북풍'만큼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