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공 정문부 장군 국가 표준 영정(그림/윤여환, 고증/조용진)문화관광부
이 비는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신음할 때 함경도 길주에서 오합지졸인 3천 명의 의병들을 모아 왜군 2만 8천 명을 물리친 것을 기린 것이다. 그런데 약 200년 뒤 러·일 전쟁(1904~1905)이 일어나,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아케다 마사스케 소장이 이 비석에서 자국 조상의 패전기록을 읽고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냈다. 그 후 이 비석은 10년간 일본 군신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 뒤쪽에 방치돼 있다 지금에야 돌아오게 된 것이다.
비에 쓰인 것처럼 정문부 장군의 공적은 이순신이나 권율 장군의 것과는 달리 더욱 빛이 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이순신이나 권율은 그래도 벼슬을 받은 채 나라의 정규군을 가지고 승리한 것이지만, 정문부는 나라의 아무 도움이 없이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소수의 의병으로 이루어낸 전과이기 때문이다.
이 비의 돌아옴은 맨 먼저 초산스님과 해주정씨대종친회 등 민간 쪽에서 움직였지만 지난해는 나라가 ‘광복60주년기념사업’의 하나로 선정하여 문화재청을 중심으로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통일부, 외교부 등이 총력을 기울여 성사시켰다고 한다. 일본과의 관계뿐 아니라 북한과도 원만한 합의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 과정에서 이해찬 총리의 적극적인 지원이 크게 효과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이 일의 가운데서 애를 썼던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홍윤식 단장의 소감을 들어보았다.
▲남한과 북한이 서명한 북한대첩비 인도인수 합의서문화재청
“북관대첩비는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민족혼이 100년만에 귀환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항일 정신의 상징물이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의해 우리 의사에 반해서 빼앗겼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민간과 정부, 남과 북이 함께 힘을 모아 치밀한 전략을 통해 환수받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원만하게 돌려받은 것은 앞으로 계속될 해외문화재 반환사업에도 좋은 선례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참 기뻤고, 공항에서는 정말 감개무량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북한으로 가기 때문에 이젠 쉽게 볼 수 없다는 섭섭함은 있지만 원래의 자리에 두는 것이 맞는 일이기에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바람이 있다면 길주 원 소재지에 잘 복원이 되고, 장차 남한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북한의 배려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 구체적인 실무를 맡았던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이수빈 기획전문위원은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동안 민간차원에서 27년간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지만 일본이 민간차원이 아닌 정부 차원의 합의를 요구해왔기 때문에 당위성이 있었지만 어려웠던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극적인 것은 광복 60년 기념사업으로 선정한 뒤 이해찬 총리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때 북한의 김영남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의 합의를 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12일 '북관대첩비 반환 합의서'가 서명됐다.
▲충덕사에서 열린 충의공 제향의식 중 고유문을 읽는 동안 읍하고 있는 초헌관 유홍준 문화재청장, 김원웅 의원김영조
남북은 같은 해 12월 16일 제17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관대첩비를 본래 있던 자리인 함경북도로 조속히 인도하기로 합의했다. 또 좀 더 구체적으로 올 2월 13일 북한의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와 남한의 ‘한일불교복지협회 북관대첩비민족운동중앙회’,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회‘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수빈 위원은 또 하나의 비사를 전해준다.
"우리는 북관대첩비 되찾기를 추진하면서 이왕이면 광복 60년을 맞는 지난해 8월 15일을 희망했지만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가 일본으로 간 지 100돌이 되는 10월 21일도 의미가 있다 싶어 차선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북한이 돌려받은 뒤 남한 사람들의 참배를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황을 말해주었다.
"북한은 북관대첩비 되찾기를 '올 3대 애국사업의 하나'라고 말하지만 인도인수식을 최대한 간단하게 하도록 한 것을 보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길주의 위치나 형식상의 문제로 쉽지 않겠지만 우리 쪽에서는 상황을 보아가며, 정기적으로 참배할 것을 꾸준히 요청할 것입니다."
▲정문부 장군 묘소 참배 뒤 묘비 설명을 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김영조
또 그는 "애초 일부에서는 무모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위원회의 성격이 반관반민이어서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이런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상대를 자극하는 것과 국수주의로 흐르는 것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위성이 있어도 상대가 있기에 합리성과 전술전략이 없으면 일이 그르칠 수 있으며, 선정적인 추진도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북관대첩비는 원래의 자리인 북한의 길주로 가지만 복제품 두 개를 만들어 경복궁과 독립기념관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제(2월 28일) 늦은 2시엔 의정부 용현동에 있는 정문부 장군의 묘소 앞에 있는 충의사에서 ‘북한대첩비 충의공 제향의식’이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장 김원웅 국회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 해주정씨대종회 정태류 회장과 문중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행사는 전통유교의식에 의한 고유제로 집례는 하유집 충덕사 원장, 초헌관은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김원웅 의원, 아헌관은 김태훈 문화원장, 종헌관은 초산스님이 맡았다.
▲충의공 정문부 장군 묘소(의정부시 용현동 소재)김영조
북관대첩비를 모셔두고 열린 고유제 뒤에는 행사 참여자들의 묘소 참배가 있었고, 경기도립 국악관현악단의 아악 연주, 경기도립 무용단의 태평무 공연, 취타대 공연, 영상물 상영도 곁들여졌다.
오늘 3월 1일은 우리 겨레가 일제의 강점에 맞서 독립만세로 항거했던 삼일절이다. 이를 맞아 항일의 상징물인 북관대첩비가 제 자리를 찾으러 북한으로 간다. 판문점을 넘어 10시 개성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북에 인도한다.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우리 땅을 지켜내던 북관대첩비가 그동안 수십 만의 일본 군신들의 놀이터였던 야스쿠니신사에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욱 의미있는 삼일절이 되었다. 감격의 삼일절이다.
| | "북관대첩비, 복원된 곳에 가서 보고 싶다" | | | [인터뷰] 북관대첩비 환수 추진한 해주정씨대종회 정태류 회장 | | | |
| | | ▲ 해주정씨대종친회 정태류 회장. | | 북관대첩비를 돌려받기 위해 애를 썼던 곳은 해주정씨대종친회도 있다. 정태류 회장을 만났다. 그는 정문부 장군에 푹 빠져 설명하기에 바빴다.
- 어떻게 북관대첩비 되찾기를 추진했나.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 조소앙 선생의 <대한흥학보> 등에 기록이 있지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손들도 알고는 있었지만 적극 나서지 못하다가 1978년 <조선일보>에 최서면 선생이 발견했다는 기사가 실린 뒤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정부에는 물론 일본에도 직접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 자리인 북한의 동의 없으면 돌려줄 수 없다고 해 벽에 부딪혔다.
그래서 한동안 주춤했는데 초산스님이 한일복지협회장인 일본측 스님과 합의한 뒤 정부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초산스님이 북한의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와 합의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더 큰 도움은 역시 이해찬 총리가 북한의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합의해준 것이다.”
- 북관대첩비를 돌려받은 것에 대한 감회는.
“후손으로서 100년 만의 '비' 환국은 말할 수 없이 감개무량하다. 더구나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을 때 480kg 비의 배에 1톤이나 되는 머릿돌을 얹어놓았던 게 마음이 늘 아팠는데 이제야 선조에 대한 죄를 씻은 것 같아 다행이다. 또 수십 만의 일본 군신을 혼자 대항하고 있었을 비를 보면 정말 감격밖에는 더 말할 것이 없다.”
- ‘해주정씨대종친회’로서는 북한으로 가는 게 많이 아쉬울 텐데….
“물론 북한으로 가면 남한에 있는 우리 해주정씨 종친들이 쉽게 볼 수가 없을 것이기에 서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재란 원래 있던 자리에 가는 것이 맞는 일이고, 정문부 장군도 원하실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도 복원된 자리에 가서 볼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또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동에 대해 공동 학술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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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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